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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7:52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구려 : 15대 미천왕, 드라마 같은 삶

고구려 : 15대 미천왕, 드라마 같은 삶

휘는 을불,
서천왕의 손자로 태어나 귀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숙청되는 바람에,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게 되었다.
백부의 칼날을 피해 신분을 숨기고 머슴으로 살았는데,
여름에는 주인놈이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못 잔다고 지랄을 하여, 밤마다 연못에 돌을 던져야
했다고 한다.
을불은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년 만에 뛰쳐나와 어찌어찌 소금 장수가 되었는데, 
이 또한 만만치는 않아서,
압록강변의 웬 못된 할망구가 신발 도둑으로 모는 바람에 현행 절도범으로 곤장을 맞았고,
소금을 몰수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팔자는 알 수가 없어서, 안습의 세월을 보내던 을불은,
봉상왕의 폭정에 열받은 국상 창조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느닷없이 왕이 되었다.
개구리 쫒게 하던 주인놈하고, 저 괘씸한 할망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떨결에 왕이 된 을불은 초년고생이 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왕과는 차원이 다른 정복군주가 되어, 이래저래 부담이 컷을 창조리를 흐뭇하게 하였다.

300년, 즉위한 후,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는데,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고,
311년, 서안평 점령하여 낙랑군 및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에 낙랑의 군벌 장통은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며, 
313년, 낙랑 마침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병합 하여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 세력을 완전히 축출 하는 개가를 이루었고.
317년에는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여 박살내었다 .

한반도를 정리한 후엔 요동으로 눈을 돌렸는데,
마침,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요서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위협을 느낀 서진의 평주 자사 최비는 고구려에 요동 분할 점령을 제의하였다.
중국놈들의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술이기는 했으나, 손해 날 일 또한 아니었으므로
318년, 선비족의 우문부, 단부 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였고 수도인 극성까지 포위하였다.
그러나 미천왕 못지 않게 영민한 군주였던 모용외가 교란작전을 펼치며 연합군을 와해시켜 버렸기에, 소득없이 철수하고 말았고,
작전에 완전히 실패한 최비는 처자식까지 내팽개치고 319년 고구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용부의 보복 공격에 하성을 지키던 여노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서로 치고 받으며 공방전을 이어갔으나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고,
330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모용부를 견제하였다.
331년에 서거하여 미천의 들에 영면하였다.
30년 5개월 간의 재위였다.

당시의 내정은 반정 공신이자 귀족세력의 두목격인 창조리가 총괄하였을 것인데,
외정의 좌충우돌도 내부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미천왕의 업적은 창조리의 정치가 나쁘지 않았고, 왕과도 호흡도 잘 맞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미천왕은 소시적에 고생은 하였으나, 옥좌와 훌륭한 재상을 함께 얻은 행운의 임금이기도
하였다.

318년의 요동 분할 작전이 성공하였더라면,
일찌감치 요동을 차지하고 세력을 키워 고구려의 전성기를 앞당길 수도 있었을 것이나,
모용외라는 호적수를 만나 성사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명군이었다.

*모용외는 전연의 시조뻘이 되는 상당한 인물로서 요동을 먼저 차지하고 앉아 미천왕의 애를 태운,
미천왕 인생 후반의 최대 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얘도 명군이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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