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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0일 (토요일) 12:13 오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긴 이야기의 시작

신라 :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긴 이야기의 시작

신라의 창업 군주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박씨들의 조상이다.

기원전 67년 경주에 위치한 사로국이라는 도시 국가 비스무레한 곳에서 6부 촌장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백마가 표주박 같이 생긴 커다란 알을 가지고 나정이라는 우물가로 내려 왔더란다.
알이 깨지면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갓 태어난 애를 동천이라는 샘까지 데리고 가서, 물을 데우지도 않고 씻기자,
애 몸에서 광채가 나고 별의 별 희한한 일이 생기더니, 태양과 달의 빛까지 더 밝아졌다고 한다.

혁거세는 밝은 해 또는 밝은 이라는 뜻의 이두식 표현으로,
이 신기한 아이가 기원전 57년, 13세에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웠고 천년 왕국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국호는 서나벌, 왕호는 거서간으로, 거서간은 왕 또는 존귀한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인인 알영도 신화가 있는데, 이 여인은 우물가 출생으로  특이하게도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화의 왕답게 사망 설화도 있는데,
재위 62년을 끝으로 하늘로 승천하였는데, 황당하게도 7일 만에 시신이 부위 별로 나뉘어 지상으로 떨어졌고,
백성들이 그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 지내고자 하였으나, 
웬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따로 다섯 개의 무덤에 묻었다고 한다.
이 무덤들이 현재 오릉 또는 사릉이라 불리는 무덤들이다.

대부분의 신화가 그렇듯이 신라의 건국 신화도 우의적 표현일 것인데,
난생 설화는 엄마의 불륜을 의미하거나 외부 세력의 유입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박혁거세는 유입 세력이었을 것이고, 백마 전설로 보아 기마 민족 계열일 가능성이 있다.
사망 또한 특이한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사지가 분리되는 것은 흉사일 가능성이 크므로,
세력의 분열 또는 쿠데타를 의미하는 기사일 것이다.
왕비 알영 또한 출생이 특이한 것으로 보아 이주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용 전설이므로 해양세력 즉 해적들이 아니었을까?

이 시기는 가히 전성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한반도에 유난히 이주 세력들이 많았는데,
추모, 유리, 온조 등이 본거지를 떠나, 신세계로 향하였고, 나라를 세워 왕 노릇을 하였다.
이들이 서로 도미노처럼 밀어내거나, 내부갈등으로 일부가 딴 살림을 차리거나 한 것이 아닐까?

즉위  17 년 차인 나이 서른에 비로소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는지, 왕비와 함께 6 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19년에는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는데 …. 뻥인 것 같고,
21년에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
26년에 궁실을 지어 나라꼴을 좀 잡았다 .
30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는데…택도 없는 이야기고,
아마도 옛날 생각하고 껄렁한 몇 놈이 강도질하러 왔다가, 제법 틀이 잡힌 신라를 보고 공격할 엄두를 못 내어 돌아갔다….가 진실일 것이다.
즉위 38년엔 표주박을 타고 일본에서 넘어온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사신으로 간 놈이 겁도 없이 마한 왕을 열받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마한 왕은 호공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는데,
이듬해 마한 왕이 죽자, 되려 신라의 신하들이 마한 정벌을 권하였다고 한다.
신라에 제법 힘이 붙었었나 보다.
즉위 53년에는 동옥저에서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

고대사를 공부할 때의 재미인, 제멋대로 상상하기를 해보면,
나름 풍요로운 땅 경주에 올망졸망한 세력 대여섯이 모여 국가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칼 든 외부 세력이 도착하였다, 그것도 둘씩이나.
이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된 전투 집단 즉 고향에서 권력투쟁에 패배하고 도망한 세력이거나,
배를 타고 온 해적 무리이거나 등등 뭐 이런 종류들이었을 것이므로,
얘네들이 소서노 아줌마의 자식들 처럼 세력이 컸다면, 국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부족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지배하였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기에 온건하게 토착 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타협의 결과물이 화백 회의를 비롯한 귀족들의 권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초창기의 어수선함이 이후 박, 석, 김으로 왕성이 바뀌는 왕통의 불안정으로 나타났다…가 아닐까?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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