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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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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29대 태종무열왕, 중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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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는 폐왕 진지왕의 장손자였다.

유교의 세례를 받기 전의 고대에서 폐왕이 되었다 함은,
비상한 사태가 발생하여, 왕을 포함한 핵심 정권 담당자들이 물리적으로 제거되었음은 물론, 당시 지배세력 또한 완전히 몰락하였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패배한 자들은 분노에 치를 떨며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고, 승자들은 지은 죄가 있기에 되치기의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므로,
승자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였을 것이고, 패자들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승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진평왕이, 잠재적 불온세력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장자 김용춘을 사위로 삼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짓을 하였다.
사위상속이 전통이었던 예전의 신라라면, 이는 진평왕이 자신의 쿠데타를 반성하여,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에게 양위하기로 마음먹은 나름 고귀한 행위였을 것이나,
자신의 가계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던 진평왕이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당시 신라는 눌지왕 이래 이미 부자상속이 정착되어, 부마는 더 이상 욍위 계승과는 인연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하였으므로,
최대 정적 김용춘에게 실권이 없는 명예를 주는 대신, 자기 딸내미 천명공주의 평생 밀착 감시를 받게 함으로써,
어린 놈이 감히 복수를 꿈꾸며 자체 세력을 키워, 진평왕과 현 조정의 높으신 어르신들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천명공주가 아버지의 안락한 수면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는 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적과의 동침을 강요 받는 정략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천명공주가 자식이라도 낳게 되면 이 또한 김용춘에게는 혈연적 족쇄가 될 것이었다.
따라서 김용춘은 때론 마음의 휴식이 되고, 때론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는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감시자이자 조련사를 배정받은 꼴이 되었는데,
김용춘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이 정략 결혼으로 인해 평생 괴로워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귀신 두목으로 살아야 했던 막내 동생 비형랑 보다는 나은 삶이었고,
거기에 김춘추라는 걸출한 아들도 얻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장가를 잘 간 셈이 되었다.

진지왕의 직계에는 폐족의 딱지를 붙이고, 자신의 직계에는 석가모니의 가계를 복사&붙이기를 하여,
대망의 석가모니가 태어나기만 하면 불국토를 선언하고,
세세만년 자기 핏줄만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하려던 진평왕의 남사스러운 계획은,
54년간 아들을 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딸만 줄줄이 얻은,
진평왕의 얄궂은 운명으로 인하여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폐기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평왕의 석가모니 왕 만들기 계획이 어그러지면,
황당하게도 고위급 밀착 감시자까지 붙여 놓았던 폐족의 수장 김용춘이,
전왕의 장자이자 현왕의 사위라는 신분으로 졸지에 왕위계승 서열 1위가 되어 버리는 골 때리는 상황이발생하고,
만약 서열대로 김용춘이 왕이 되면,
복수심 여부와 관계 없이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지 아버지를 복권시킬 것이 뻔하였다.
그리되면 진지왕을 폐위했던 진평왕은 빼박 찬탈자로 전락하게 되고,
진평왕을 옹립했던 현 집권세력 또한 줄줄이 역적으로 엮기게 되므로,
‘명분이고 국익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보신이 최우선’ 인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기득권자들처럼,
당시의 집권세력은 김용춘에게 유형, 무형의 다양한 견제를 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살얼음판 같은 정치 상황에서 김용춘이 괜히 왕위 계승의 헛 꿈을 꾸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지도 모르게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고,
그의 장자 김춘추 또한 아버지가 잘 못되면 1+1으로 맛이 가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 김 용춘, 춘추 부자는, 마누라들이 아들을 못 낳아 열을 잔뜩 받고 있었던 진평왕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것이다.

김춘추는 어머니가 성골의 창시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였고, 아버지도 전왕의 장자였으므로,
삼국사기에서 정의하는 성골 기준 즉 부모가 모두 왕족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만,
진지왕 계열은 왕위계승불가 딱지가 붙어 있는 미운 오리 새끼들이었기에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골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 있는 처지의 김춘추는,
역시 망국 가야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김유신을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진평왕 말기에 칠숙의 난을 진압하고 여왕을 옹립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활역에 힘 입어 선덕여왕의 의붓아들이 되었다.
폐족이 실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왕의 등극으로 표면화된 신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끝장을 보려는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는
신라를 더욱 옥죄었으므로,
왕이 되기 전의 김춘추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천둥에 개 뛰듯,
고구려와 왜를 찾아 읍소와 구걸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별 성과는 없었고, 고구려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인근 국가들의 냉대와 괄시로 인해, 체면은 고사하고 국내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협받게 된 김춘추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그 효용이 입증된 원교근공책에 따라,
멀리 있는 당대 최강대국 당나라에서 살 길을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에 입조한 김춘추는 나라도 살리고 자신도 살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당황제 이세민이게 매달렸다.
신라를 여왕이 통치하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며 멸시하던 이세민이는,
고구려 안시성주에게 한방 제대로 맞은 후에는 인식을 바꾸어,
신라를 고구려에 대해 양면전선을 형성할 수있는 후방공략기지로 대우하였으며,
고구려를 점령하면 평양 이남은 신라의 영역으로 인정하겠다는 밀약과 함께 동맹을 맺어주었다.

이쁘고 말 잘 듣던 진덕여왕 사후, 무열왕은 김유신의 무력과 자신의 외교 치적을 바탕으로,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아 654년 왕위에 올랐는데,
군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왕권처럼 허망한 것도 없으므로,
폐왕의 자손으로 자체 무력이 미미했던 무열왕은,
즉위 이듬해에, 당대 최고의 군벌로 성장한 동맹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소생인 법민을 태자로 삼았고,
또, 문희 소생인 딸 지조를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어 처남을 사위로 삼았다.
김유신 입장에서는 외조카와 결혼한 것이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해괴한 일이지만,
중첩된 혼인관계로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고대의 관행이었고, 그 중에서도 신라는 더 심했으므로 그러려니 하자.
이 해에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에게 북쪽 변경의 성을 무려 33개나 빼앗겨 당에 SOS를 날렸고,
당은 이에 화답하여,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비록 소정방의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고구려의 압력을 해소하는 효과는 있었다.
3년부터 아들을 비롯한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며 왕권을 강화하였고,
7년 차에 최측근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내부정리를 완결하였다.
상대등은 신라 최고위 관직으로 대대로 귀족세력의 수장이 맡는 것이 관례였고, 주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러한 막중한 자리에 가야 출신 가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김유신을 임명함으로써,
잠재적 불만세력이었던 옛 가야 출신들의 체제 내 편입을 완료함과 동시에,
신라의 신주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왕권의 대척점에 서기 쉬운 기존의 여타 귀족세력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맡김으로으로써,
왕권도 강화하는 양수겹장의 묘수를 쓴 것이었다. 
이러한 내부정리는 이후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운영체제가 얼굴 마담을 내세운 간접경영에서 실세의 직접경영으로 바뀌든,
내부 정리를 하든 말든, 대외 여건은 별로 달라지질 않아서,
백제 의자왕은 끝장을 볼 기세로 더욱 가열차게 공격하였고,
고구려도 당이 침공을 멈춘 틈을 이용하여, 배후의 안전을 위해 신라를 두들겼는데,
설상가상으로 당대의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신라의 오랜 후원자였던 당태종 이세민이가 뒈져버렸다.이로써 오랫동안 공들인 신라의 구걸외교는 거덜나기 직전이 되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뒤를 이은 비리비리한 당고종이 지 애비 보다 더 뛰어난 필살기를 시전하며, 신라에 구원의 동아줄을 던졌다.
사실 이세민이는 김춘추와 밀약을 맺을 정도로 신라를 대우하였지만,
백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정작 신라의 위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사람 팔자 뿐만 아니라 나라 팔자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여서,
세민이가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예상과 달리 분위가 급반전하여 백제에 대한 당의 직접 침공이 성사되었다.
덕분에 신라는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지장보살을 만난 정도가 아니라, 승천하여 옥황상제를 만난 셈이 되었고.

대망의 660년, 마침내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배에 올랐고, 김유신의 5만 군사 또한 백제로 향하여,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고, 당나라 군대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의 숨통을 끊었다. 
이 후 소정방은 당으로 돌아갔고 신라도 전후 정리를 시작하였으나,
백제는 망한 후 더 거세게 저항을 하였고, 고구려도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열왕은 백제부흥군을 잡기 위해 태자와 함께 친정까지 해야 했는데,
지 애비보다 더 음흉하고 매몰찼던 당고종은 점령한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권리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마저 지들의 식민지 정책인 기미지배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 동안 당의 지원을 얻기 이해 남발했던 외교적 수사들이 독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당은 제 멋대로, 신라도 개고생을 했던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왕자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갑질을 하였으므로,
겉 모양만 보면, 마치 백제가 부활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래서야 종노릇을 하며 백제를 멸망시킨 보람이 없기에,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조야는 당과 일전불사를 외치며 펄펄 뛰었으나, 
무열왕은 그저 침묵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외세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었던 자연인 김춘추의 한심하고도 소심한 망설임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백제부흥군의 여전한 저항, 상존하는 고구려의 위협, 그리고 왜의 동향 등을 고려하면,
그래도 비빌 언덕은 당밖에 없었고,
설령 다른 요인들이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해도,
당대의 패권국 당과 싸우는 것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의 상황이 아닌 한 미친 짓에 가까웠으므로,
당시의 침묵은,
당대의 뛰어난 정치가다운 냉철한 판단에 의한 인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열왕은 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인데,
그래서인지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더욱 심해지고, 고구려까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 오는 등,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8년, 6월에 평생의 운을 다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비록 폐족의 종손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인생역전에 성공하여,
무열왕계 왕통의 시조가 되는 광영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서거 당시에는 나라가,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국이었으므로
저승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고 대식가였다고 한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로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저자세 굴욕외교로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루는 바람에,
한민족의 무대가 반도로 국한되었고, 결국 사대하는 민족이 되었다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류의식이 없었고,
백제 또한 성왕의 목이 잘린 이후부터는 신라를 철전지 원수로 대하였으므로,
삼국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적대적인 외국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아예 없던 이러한 상황에서,
무열왕에게 ‘같은 민족의 등에 외세의 칼을 꼽는다’는 죄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열왕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건,
당시 신라인에게 태종무열왕은 누대의 원수였던 백제를 멸망시킨 영웅이었으며,
백제의 침략에 대한 걱정 없이 생업에 몰두 할 수 있게 해준 은혜로운 임금이었다.
그는 원효대사의 장인 즉 설총의 외할아버지도 된다.

여담이지만,
신라 왕들 중 묘호가 알려져 있는 왕은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 열조 원성왕 이렇게 셋인데,
무열왕의 묘호가 하필 생전에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던 당태종 이세민이와 같아,
중국 놈들이 신문왕에게 시비를 걸고 철회를 요구했지만,
신문왕은 전성기 신라의 왕답게 완곡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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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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