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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3:26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30 대 문무 대왕, 용이 되리라

신라 : 30 대 문무 대왕, 용이 되리라

김 법민, 삼국통일의 완성자.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소생으로 무열왕의 장자이다.
진지왕 계열과 가야 계열의 통합의 상징으로 영특, 총명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왕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진덕여왕 치세에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외교를 배웠고,
여러 관직을 거쳐 태자가 된 뒤에도 영원한 후견인 김유신과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무열왕 7년, 상대등 김유신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부왕이 승하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기승을 부려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기에,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주로하며 즉위년을 보내었다.
즉위 이듬해에 탐라의 복속을 받았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여전히 쌀 배달에 종사하였다.
3년에는 부산성을 쌓았고,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꺾었는데,
당나라 놈들이 지들 멋대로 계림주대도독 임명장을 수여하여, 왕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힘이 없으니 참고,
당군 40만과 함께 백제, 왜 연합군을 백강어귀에서 궤멸시켰으며,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거의 평정하였다.
4년차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5년에는 당의 강요로 취리산에서 부여융과 회맹할 수밖에 없었고,
백제가 형식적으로나마 독립하는 꼴을 보아야 했다.
이 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타이름까지 받아 멘붕이 되었다.
6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두들겼으며 연정토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7년에는 신라의 왕을 일개 대장군에 임명하는 등 당의 무시와 무례가 더욱 심해졌으나,
참으며 쌀 배달을 하였다.
8년에 드디어 고구려를 향해 전군을 동원하였고,
대각간 김유신에게 내정을 맡기고 친정하여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신라마저 먹으려 하자,
이미 선대부터 예견하고 있던 바이므로 당과의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0년에 요동을 선제공격하며 나당전쟁의 시작을 알렸고,
백제를 향해 진군하여, 11년 웅진도독부를 박살내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당대 최강의 패권국 당나라를 상대로 제대로 한판 붙은 것이다.
13년에 신화와 같은 태대각간 김유신이 사망하였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심적 타격이 막심한데, 불행은 동행한다더니,
반란의 기미도 보이고, 당의 공세가 가중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14년에도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과 싸웠으나,
당이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대규모 공격을 기획하는 등,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15년에는 당과 무려 18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을 하여 모두 이겼다.
이때 그 유명한 설인귀를 패퇴시키는가 하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당군을 두들겨 쫒아내었다.
16년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하였다.
21년, 죽어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

문무대왕은 김유신 장군과 태종 무열왕를 합쳐 놓은 듯한 사람으로서,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음은 물론 군사 전략에도 밝았다.
백제 공략전과 고구려 공략전에 모두 직접 참전하였으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 부흥군의 지도자들에게 골품을 부여하는 등, 구 백제, 고구려 세력들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나당전쟁을 수행하여, 한반도를 영토화하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나당전쟁은 한반도의 제 세력들이 합심하여 외적과 맞서 싸운 최초의 전쟁으로서,
전쟁 승리의 요인으로는,
때 맞춰 발생한 티벳을 비롯한 당 주변 국가들의 잇따른 발기 및 당의 연속된 군사적 실패,
그리고 이를 적절히 이용한 외교,
탄탄한 전쟁 준비 및 제갈량 뺨치는 대왕의 탁월한 전략 등 여러가지를 열거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적대적 포로가 아닌, 동일한 적을 마주한 동지로 대우하여,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 없이 대당 투쟁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대왕의 탁월한 혜안과 용기 그리고 포용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다른 요인들이 우호적이었다 해도,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패권국 당을 꺾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한반도는 중국 땅이 되었을 것이며, 통일 왕조를 통한 동일체 의식 따위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대왕의 유조로 평을 마무리한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여,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우리 민족의 비조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대한 군주라 아니할 수 없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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