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C
Seoul
2024년 4월 18일 (목요일) 4:16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51대 진성여왕, 후삼국시대의 개막

신라 : 51대 진성여왕, 후삼국시대의 개막

김 만, 경문왕의 막내딸로 오라버니들의 뒤를 이었는데,
상당히 똑똑했던 모양이고,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아가씨였던 듯하다.

887년 갓 스물 정도의 나이에 옥좌에 앉았는데,
왕 노릇이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는지, 섭정 전문 숙부, 각간 김위홍에게 섭정을 맡겼고,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들었다.
이듬해에는 김위홍과 대구화상에게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다.

김위홍이 죽자 친정하였는데,
친정만 하면 발생하는 반란은 이번에도 어김이 없어,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인 5년에는 북원 양길의 부하 궁예가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 동부락과 명주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6년인 서기 892년에는 견훤이 완산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라 자칭하니, 무주 동남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후삼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라는 손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가고, 대책은 없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해외 유학파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올렸다.
여왕은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내용이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인지라, 당시의 기득권층인 진골 귀족들과 이해가 상충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반발을 꺾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갖춘 왕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철없는 아가씨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고, 최치원은 도나 닦으러 갔다.
해외 유학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가 아는 지식을 현실에 맞게 적용시키는 걸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탁상공론만 하는 서라벌의 높은 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궁예는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고 하슬라로 쳐들어 왔는데, 그 무리가 600에 달했고,
이듬해에는 저족,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다음해에는 서남쪽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데 아마도 견훤의 후백제를 말하는 것 같다.
이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는 서라벌 중심의 초창기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여왕은 철들만 하니까 병이 들었고, 큰 오라버니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30대 초반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897년의 일이었다.
10년간 재위하는 동안, 나라가 망가져 가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으며,
음란하다는 악평이 무색하게 일점혈육도 남기질 못하였다.

신라를 진성여왕이 망쳐 놓았다는 악평이 많으나,
일대기를 훑어보면, 딱히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비난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록에는 여왕이 음탕하여 유부남인 숙부와 간통하였고,
그 불륜에만 탐닉하여 나랏일은 신경 쓰질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 정도는 신라 왕실에서 늘상 있었던 일이고,
당시나 그 이후 고려 초까지의 성 풍속을 봐도 진성여왕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간신의 무리라는 게 반대파의 입장에서 본 친위세력일 것이고,
대대로 상시 반란에 시달렸으니, 죽지 않으려면 친위세력을 우대해야 했을 것이다.
낭비가 심해서 국고가 텅텅 비었다고 하지만, 각 주군에서 조세가 올라오지 않아 궁핍에 시달렸고,
토목공사 한 번 할 수가 없었는데, 뭔 낭비를 그리 심하게 하였을까?
미소년들과 사랑에 빠져, 음란한 행위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비난하는 대자보까지 붙어 곤욕을 치렀다고도 하는데,
선덕여왕은 다 늙은 여자가 형부 포함하여 남편만 3명을 들였는데,
꽃다운 20대 초반의 처녀가 잘 생긴 총각들하고 연애 좀 한 게 그렇게 문제가 될까?
향가 모음집이었다는 삼대목은 전해지진 않으나 업적이라고 할 만하고.
도대체 뭔 나라를 어떻게 망쳤을까?
이미 기울어진 상황에서, 나이 어린 여자가 왕이 되는 바람에,
근근이 유지되던 왕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그 동안 쌓여 있던 모순들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는 것이 정당한 평가 일 것이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몸에 병이 많아 한가함을 좋아하고,
말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하고, 한 번 뜻한 바는 빼앗지 못하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로서,
성군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안쓰러운 아가씨였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advertisement-

댓글을 남겨 주세요.

귀하의 의견을 입력하십시오!
여기에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spot_img

많이 본 뉴스

-advertisement-

인기 기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