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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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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 3대 문왕, 나라를 반석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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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자니 겁나고, 복속되기는 싫고, 살기 위해서는 교류가 꼭 필요하고.
우리 민족 사 내내, 사람 심정 복잡하게 만드는 대륙의 제국.
이 염병할 놈들은 문왕에게도 주적이자 최고의 파트너였는데,
대단한 아버지 무왕 덕분에,
당시 대륙의 주인이었던 당나라와 굴종이 아닌 국익 우선의 평화 관계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문왕의 행운이었다.

대 흠무, 무왕의 3남으로, 73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문왕의 대당 정책은 ‘개입은 최소로 하되 실리는 열심히 챙기자’로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했을 때에는 현종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였고,
고구려 유민출신의 이정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군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고말만 팔았다.

당과는 황제든 반란군이든, 전쟁으로 엮이는 것을 극력 회피하였으나,
주변의 말갈 부족을 정벌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아,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 대부분을 복속시켰다.
이 정도 외치만 해도 빼어난 업적이지만 내치는 더 훌륭하였다.
당의 문화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3성 6부의 정부조직을 갖추었고, 주, 부, 군, 현, 제를 도입하였는데, 그 명칭이나 기능은 당과 많이 달랐다. 소위 주체적 수용을 한 것이다.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는데, 이 동네는 철과 베,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755년 무렵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겼고,
785년 무렵엔 해양교통의 요지 동경용원부로 옮겼다.
남들은 한 번도 힘들어 하는 천도를 수시로 한 문왕, 아무리 발해의 특수성 덕분이었다 해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외, 남경남해부, 서경압록부까지 설치하며 5경을 채워, 넓은 영역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통치와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하였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이었다. 

문왕은 발해의 정체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고, 고구려 왕들처럼 자신을 천손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을 사위 국가로 표현하여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천손이란 천하의 주인이라는 뜻이므로, 발해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과는 군사적인 관계에서 경제적인 관계로 전환하였고,
연합하여 신라를 치려던 계획도 중지하였다.
신라와도 관계를 개선하여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의 국경에 이르는 길에 39개 역을 설치하고 신라도라 불렀으며, 국경에 교섭 창구의 기능을 하는 탄항관문을 설치하였다.

무왕이 좌충우돌하며 발해를 확장시키는 데 주력한 반면,
문왕은 제도를 정비하였고, 국토를 개발했으며, 외교에서 국격을 높이는 등,
내치 및 외교에 주력하여 발해의 완성도를 높인, 화려하진 않아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임금이었다.
자식들보다 오래 살며,
70세를 넘겨서까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현군이었다.

문왕 덕분에, 이어진 후계 왕들의 혼란기에도 발해가 유지될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가 고루 융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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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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