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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요일) 7:34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태조 왕건(3), 투자 유치의 달인?

고려 : 태조 왕건(3), 투자 유치의 달인?

태조는 그다지 강한 임금이 아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세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궁예가 고생 고생하며 만들어 논 것을, 한밤중에 담을 넘어 삼켜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친위 세력이 강할 수 없었고,
쿠데타에 동조했거나 인정한 세력들도 진심으로 복종했다기 보다는 상황논리에 굴복한 것이었으므로,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민심 또한 불안하여 쿠데타 이후 세금을 낮추고 흑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철원은 여전히 불온하였다.
이렇게 위, 아래 모두 편치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의 반란 또는 분리를 막고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 특단의 조치라는 것이 철원을 탈출하여 본거지인 송도로 도망을 가는 한편 장가를 많이 가는 것이었다.
29명의 부인이라는, 많은 혼인 동맹 이 필요했다는 것은 태조의 입지가 그만큼 취약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뭐 하나 맘 편한 구석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태조는,
즉위 이후 서경을 개척하는 등 북진정책 을 꾸준히 시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상의 이유도 있었겠으나,
정권의 배후세력 확보라는 보다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느닷없이 전투 전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의 유민 이 유입되어,
부실한 친위 세력을 보강해 주는 한편 통일 전쟁을 거들어주었다.
이는 그간의 북진정책이 결실을 맺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자고로 유, 이민 집단이 날 설고 물 설은 땅에 제대로 적응하기까지는, 태생적인 이질적 요소로 인해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법이고, 
용병 비슷하게 생활해야 했던 발해의 유민들이라면, 
나라 잃고 남의 나라 땅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을 비롯한 내부갈등 및 구성원들의 적응의 정도 차이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로 고용주인 태조를 괴롭혔을 것이다.
발해 유민들은 훌륭하기는 하나 다루기는 힘든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대 거란 정책을 보면,
신생 소국 주제에, 칼 한 번 맞대지 않은 이웃의 강대국에서 처음 온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인 낙타를 만부교에 매어 굶겨 죽이는 등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정신 나간 짓은 나중에 거란의 대규모 침입의 명분이 되었으므로, 태조의 외교적 실책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친화력의 달인이고, 천년 신라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주어담을 정도로 탁월한 외교적 감각을 소유한 태조가, 이러한 이상한 짓을 한 이유가 뭘까?
뭔가 거란에 대단한 유감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데,
한반도 밖은 커녕 대동강도 한 번 넘어 본적 없는 태조가 거란과 따로 원한을 맺었을 리는 없고,
태조의 세력 중 거란에 원한이 있는 집단은 발해 유민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세력들은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므로,
아마도 발해 유민들의 민원 때문에 마지 못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잘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 유민들이 그리 맘 편한 친위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었던 태조는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으나,
당대의 주류였던 호족들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왕이 못될 바에는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데, 당시 선택지는 태조와 견훤 두 곳이었다.
바로 이웃한 경우는 별 수가 없었겠지만,
양 세력의 경계지점에서 서식하고 있었거나, 상당한 힘으로 독자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들은 선택을 해야 했는데,
선택은 복잡한 손익 계산이 따르므로 항상,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지만,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자신은 물론 처자식 그리고 일가친척들의 안녕과도 직결되므로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선택지 두 곳 모두 장단점이 있었고.
경순왕처럼 둘 사이에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운 좋은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선택을 할 때 최우선적인 고려조건은 물론 생존이었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투항 후의 입지도 중요했을 것인데,
무장의 카리스마를 지닌 견훤에게 복속한다는 것은, 일인지배체제에 편입되어 부하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많은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운 태조는 주식회사의 대표 비슷하였으므로, 그에게 복속하는 것은 일종의 지분 투자와 같았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독립적 성향인 호족들에게는 고려가 끌리는 투자처였을 것이나, 문제는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고위험 고수익의 위험자산이었던 것이다.
반면 견훤에 비해 열세였던 태조 입장에서는 지분으로 배당이나 받으려 하거나, 여차하면 말을 갈아타려고 하는 소극적인 호족들 보다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호족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가 혼인 동맹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렇게 재산에, 사병에, 딸까지 바친 투자에서 성공하여 나름의 지분을 확보한 호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세가 등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것이 인지상정이니, 성공한 태조는 이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호족들의 준동을 방치해서는 새로운 난세가 시작될 수도 있었는데,
명태조 주원장처럼 안면몰수하고 사그리 때려잡을 수도 없었던 태조는,
유력가문의 자제들을 일종의 볼모로 하는 기인 제도를 통하여, 호족들을 견제하고 반란을 억제하였으며,
공신이나 중앙의 고관을 그 출신 지방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등의 향직들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사심관 제도 지방통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지방 세력들을 제대로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호족들의 사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고려는 호족 연합체 국가로 출발하였고, 
중앙집권과는 인연이 없는 귀족 중심의 봉건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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