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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3일 (화요일) 6:55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태조 왕건(2), 정력왕?

고려 : 태조 왕건(2), 정력왕?

태조의 일생을 살펴보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당대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돈 많은 호족 가문의 영특한 맏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운일 것이고,
늠름한 외모, 훌륭한 품성 그리고 최고의 교육이라는 엄친아의 3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운일 것이다.
비록 좀 위험하기는 했어도, 당대의 영웅 궁예 밑에서 전쟁을 배우고 국정 운영의 노하우를 배운 것도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고,
궁예가 왕권을 강화하며 부린 광태로 인해, 주군 살해라는 치명적인 오점이 희석되어,
쿠데타 이후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라면 운일 것이고,
하필 이 시기에 발해가 멸망하여, 전문 전투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태조의 힘이 되어 줌에 따라, 쿠데타 이후 자칫 와해될 수도 있었던 고려에 응집력을 선사하였다는 것 또한 천운이었다.
남들은 하나도 힘든 운을 겹으로 소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로써 불행 끝 행복 시작은 물론 아니었다.

태조의 천하는 이질적인 여러 계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계, 신라계, 후백제계, 태봉계, 여타 잡세력 등등, 마치 잡탕과도 같은 이 제 세력들을 모두 끌어
모은 태조의 능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통일 후 이들의 조화를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29번의 혼인을 통해 여러 호족들을 인척관계로 묶고 통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혼인 가능한 딸 자식이 없는 호족들도 있었고,
첫 번째 부인 유씨는 태조가 입신하기 전에 맞이한 부인이었으며,
혜종의 모후가 되는 둘째 부인 오씨는 한미한 가문이었고, 호족 출신이 아닌 후궁들도 있었다.
이는 태조가 부인을 정략적인 관점에서만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29명은 너무 많다.
이쯤되면 부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외척의 희소성이 없어지므로, 별 다른 신분상의 특혜나 특권을 기대하기 힘들어 지게 되는데, 
이는 외척의 발호를 예방하는 순기능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왕실을 보위하여 정권을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 또한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만일 혼인으로 국가의 응집력을 높이려 했다면 유력 가문 서넛과 혼인하는 것으로 끝냈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들이나 알 것이나,
뭐가 어찌되었건 태조의 혼인 동맹을 비롯한 각종 호족 유인책들은, 견훤과 자웅을 겨룰 때는 여러 가지로 이로움이 많아서, 
신라처럼 견훤이 피 흘리며 겨우 얻는 것들을 거의 거저 주우며 쾌재를 부를 수도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고 보니 보통 문제가 많은 게 아니었다.

나름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호족들은 통일 이후, 기존의 세력을 더욱 키우고자 하였고, 
왕의 장인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기 지역의 왕의 대리인 내지는 완벽한 영주 노릇을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되면 전국이 소 단위의 왕국으로 쪼개지는 꼴이 되어, 또 다른 난세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뭔가 대책이 필요했을 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29 이나 되는 외척 가문은 너무 많았기에 그 가치가 희석되어,
한 두 가문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고,
산전수전 다 겪었고 그 능력 또한 출중했던 태조의 생전에는 호족들이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에, 그럭저럭 나라가 굴러갔으나, 다음 대는 문제가 달랐다.

혜종의 모후가 되는 장화왕후 오씨와의 로맨스는 유명하긴 하지만,
본디 오씨 가문은 나주에서 그리 큰 호족이 아니었고,
그나마 견훤이 인생 후반기 대공세로 나주를 함락시켰을 때 집안이 적몰되다시피 하여, 
세력은 고사하고 가문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었으므로,
장화왕후와 그 소생인 왕자 무에 대한 지원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힘 있는 외척의 세도를 걱정하였는지,
아니면 맏아들을 제꼈다가 나라가 결단 나버린 견훤의 교훈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자상속을 일찌감치 선언하고 외가가 거덜나버린 무를 태자로 삼았다. 
25남 9녀라는 엄청난 수의 자식들을 보유하고 있던 태조에게, 자식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는 연애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이자 전체 맏아들이었으니 아무래도 더 애틋하였을 것이고,
타고난 무골로 몸도 튼튼하고 통일 전쟁 시 전공도 제법 되는지라, 아버지로서는 흐뭇하였을 것이니,
왕위를 물려 주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싶었던 듯하다.
대호족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자들을 보유하고 있던 외척들은 생각이 달랐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나라가 안정되어 갈수록 왕권은 강화되고 호족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토사구팽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왕위를 둘러싼 각축이 충주 유씨를 비롯한 거대 세력들 간에 시작된 것이다.
다른 의미의 난세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왕위 계승전에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대리전도 치러줘야 하는 외가의 힘이 절실하나,
태자 무에게는 그러한 외가가 없었다.
아버지도 걱정이 되었는지 왕규와 우직한 골수 무장이자 충복인 박 술희에게 태자를 부탁한 모양이나 결과적으로는 너무 안일하였다.
왕위 계승은 왕권이 신성시 되는 안정적인 왕실에서도 툭하면 사단이 나는 아주 위험한 일인데,
기세등등한 호족들 간의 균형을, 왕의 권위보다는 태조의 능력으로 겨우 맞추고 있었던 안정과는 거리가 먼 개국 초창기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웠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 정도 조치로 세상 경험이 많지도 않고 배경도 보잘 것 없는 젊은이가 무사히 왕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안이함이 놀랍다.
늙어서 감각이 많이 무뎌졌었나 보다.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겼다고 하는데,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몇 줄의 글 보다는 좀 더 실제적인 것을 남겨 주었어야 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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