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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6:12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전쟁

고려 : 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전쟁

제 1 차 여요전쟁

거란족은 4세기경부터 내몽고 일대에 거주했던 북방종족으로, 
선비족의 일파로 보이는데,
분파한 이래 중국과 초원의 패자, 그리고 고구려, 발해 사이에 끼여, ​
상황에 따라 이리 복속하기도 하고, 저리 채이기도 하는 참으로 한심한 신세였다 .
이 안습의 종족에 서광이 비추인 것은 10세기 초였는데,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분열을 일삼던 거란의 제 부족들을 통합하였고,
세력을 키워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순식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까지 집어삼키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들이 세운 요나라는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패자로 군림하긴 하였으나, 
유목국가의 한계로 인해 정복한 영토 모두를 실효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는 무슨 배짱인지 건국 초기부터 거란을 배척하면서 중국 세력하고만 어울렸는데,
중원의 역대 패자들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려와 협력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목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 거란을 전성기로 이끈 영명한 군주 거란 성종이 982년 등극하여,
고려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어찌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당연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요구였으나,
우리의 영명하신 성종 폐하와 그 떨거지들은 국제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는지, 개뿔도 없으면서 여전히 배짱을 부렸으므로,
송과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던 거란은,
배후에서 일관성 있게 적대적인 고려가 기가 차기도 하고,신경도 쓰이고 해서,
이 참에 확실히 결판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993년, 10월 소손녕이 약 10만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후 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만 고만한 호족들끼리 툭탁거리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던 고려에서, 본격적인 국제전은 조야의 혼을 빼 놓았고,
80만 대군이라는 소손녕의 과장 광고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
​항전론은 아예 없었고, 전면 항복이냐 아니면 영토를 일부 내어주고 강화를 하느냐 하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서로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서희는 항복도 할지도 없는 강화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 ​희의 외로운 주장은 메아리가 없었고,
서경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할 때, 마침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승리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소손녕은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고 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전개는 서 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고, 
조정은 드디어 회담에 응하기로 공론을 모았으나,
죽을지도 모르는 회담에 대표로 나갈 신료들은 없었으므로,결국 서 희가 유일한 대표로 회담에 나서게 되었다. 성종 임금님은 멀리까지 배웅하며 눈물의 전송을 하였고.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널리 알려진 대로 당당하고 자주적인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알찬 결과를 얻게 되어 서희를 민족의 위인으로 만들었고,
단 한 차례, 단위부대조차 지휘해 본 적 없는 서희를 장군으로 불리게 했다 .

​서희의 업적은 강동  6주를 얻었다는 것인데,
강동 6주는 현재 평안도 일대의 지역으로 당시에는 여진족들이 거주하는 땅이었다.
서 희는 거란과 친교를 맺을 수 없는 이유로 중간에 끼어있는 여진족 핑계를 대었고,
소손녕은 땅 보다는 배후의 안전이 목적이었으므로,
거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남의 땅이나 마찬가지인 강동 6주를 마치 선심 쓰듯이 고려에 이양하였다.
발해의 유민으로서, 강동 6주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여진족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었겠으나,
힘의 논리가 그러하니 어찌하겠는가?
고려는 평안도 일대를 개척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거란의 철수를 이끌어 내는 결과를 얻은 반면,
거란은 송과의 한 판 대결이라는 메인게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병력을 엉뚱한 곳에 소모하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고,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땅인 강동 6주를 이용하여 고려와  여진이 서로 치고 받게 만들었고,
사대의 예까지 받기로 하였으니, 
결과만 놓고 본다면 거란이 더 많이 챙긴 회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회담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전이기도 한데,
당시의 고려에서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 되어야 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외교관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다.
다행히 서 희가 거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당당하고 영리하게 대처한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강동 6주를 챙기는 소득을 얻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인 일의 진행과정은 매끄럽지 못했고, 이후 유사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서 희의 진정한 업적은 회담의 타결뿐만이 아니라 명목상 우리의 영토가 된 강동 6주를 실제로 개척한 것이었다.
강동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귀성 ), 곽주(곽산)를 말하는데,
서 희의 노력으로,
원래 험한 지형인 이 일대가 방어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강동 6주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대가 되었고,
이후 이어진 국가의 위기 때마다 북방 방어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은 ​변변한 전투는 별로 없었어도,
서희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영토를 주었고,
취약한 국가 시스템을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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