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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4일 (수요일) 10:26 오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3대 정종, 천둥에 놀라서?

고려 : 3대 정종, 천둥에 놀라서?

이름은 왕 요, 야심만만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한다.  
총 25남 9녀에 달하는 태조의 자녀 중 세 째 아들이고, 
충주의 대 호족 유 긍달의 외손이자 후백제의 투항 세력을 대표하는 박영규의 사위였다.
신명순선왕후의 5남 2녀 중, 요절한 형을 대신한 실질적인 맏아들이었으며, 
친누이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결혼하여 신라 왕실과는 사돈 간이었다.
혜종과는 달리 든든한 배경을 지닌 로열 패일리였던 셈이다. 

945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왕 규를 비롯한 선왕의 측근 세력을 쓸어버렸고, 
왕식렴의 서경 세력과 동맹을 확실히 하였으며, 
개국사의 불사리 봉헌에 참여하였고, 경전 간행을 위한 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 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정권 찬탈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여러 세력들과 직, 간접의 원한을 맺게 되었고, 
정통성이 심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민심은 물론 제 호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야심만만한 젊은 왕은 호족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기도 했으므로, 
약한 왕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호족연맹체국가 고려의 특성상.
왕당파들을 제외한 다른 호족들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왕을 거침없이 비판 내지 비난을 했을 것이고, 
이러한 불경에 열이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든든한 배경에 더해 강력한 동맹까지 가지고 있던 젊은 왕은 근본적인 국가개혁을 원하였고, 
그 일환으로 서경 천도를 기획하였다.

천도란, 
국가의 명운이 걸려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체제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거창한 국책사업이므로,
원활한 시행을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를 수 있는 뛰어난 정치력뿐만 아니라, 
이주해 갈 도시의 기본 인프라 및 방어시스템 구축을 위한 재정적 능력 또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말 그대로 천시, 지리, 인화를 고루 갖추어야 가능한 지난한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야심과 능력을 갖춘 탁월한 군주라 할지라도,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여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고난도의 일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얼마 안 되는 20대 초반의 젊은 왕이…
무리였다.

즉위 이듬해에 개경에서 역부를 뽑아 서경으로 보내며 사업에 시동을 건 정종은,
서경 주변의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는 한편 궁궐 공사를 독려하며,
새 수도 건설에 올인하였다.
왕이야 첫 사업이자 정권의 명운을 건 일이었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렸겠지만.
자고로 부역 좋아하는 백성 없고, 세금 좋아하는 귀족 없는 법, 
부역을 직접 담당해야 하는 개경과 서경의 민심은 악화 되었고, 
대부분의 재정을 감당해야 하는 지지 세력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확실시 되는 개경세력 등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왕식렴을 제외한 나머지 제 세력들을 모조리 반대파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이 침공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거란의 침공 위협은 자초한 면이 크다.
태조의 과도한 대 거란 적대 정책도 한몫했겠지만, 
정종이 즉위 초부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서경 천도를 천명하고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으니, 
거란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고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들 고유의 팽창 의지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거란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본격적인 외부의 위협은 정권의 자격을 시험하는 의미 또한 지니므로, 진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정종은 사신을 보내 거란을 달래는 한편, 
방어를 위한 성을 쌓고 30만의 병사로 광천사 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겉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원래 왕권이 별 볼 일 없는 고려에서, 서경 천도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인데…
30만은 좀 과했다.
유지, 관리할 ​능력이 없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휘권을 호족들에게 넘겼는데, 
호족이란 기본 속성상 나라의 안위 보다는 가문 또는 세력의 안위를 우선시 하는 족속들이므로, 
재정 지원도 안 되는 조직을 알뜰히 관리해 줄 인간들은 없었고..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결국 실익도 없이 임금의 권위만 손상시키고만 셈인데,
결과론이지만​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천도 계획을 중지하고,
역량을 총동원하여 소규모 친위 군사 조직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종은 948년 동부 여진에서 보내온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작스러운 우뢰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에 들었는데,
계속 병석에 있다가 25살 나던 949년에, 
왕식렴이 죽자 아들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동생 왕 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었으며,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서경의 역부들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정종의 죽음은 혜종보다 더 어색하다.
혁명으로 권력을 얻은 24살의 팔팔한 젊은이가 천둥소리에 병을 얻었다는 기록은, 
탁하니 억하고 죽더라는 옛날 헛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또한 그 대단한 왕식렴이 그냥 죽었고, 
왕은 친동생에게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였으며 그 후 바로 죽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러한 믿기 힘든 기록들은, 정종이 반대 세력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였음을 시사한다고 할 것이다.

기록의 이면을 대강 추리해 보면,
우뢰와 천둥은 두 세력의 충돌을 상징하고, 
그 충돌의 결과는 왕당파의 중심 인물격인 왕식렴의 제거였으며, 
아들의 목숨 구걸과 양위는 정종의 항복 선언이었을 것이다.
정종 사후 평양 역부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왕의 죽음도 자연사로 보이지는 않고.
뭐가 어찌 되었건, 씩씩하고 늠름했던 혜종을 병약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만들었던 정종이, 
그 저돌적이고 야심만만했던 삶과 다르게, 고작 천둥소리에 놀라 인생을 마감한 졸장부로 묘사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4년 간의 재위였는데, 
고작 이 정도 해먹으려고 형을 그토록 핍박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나 싶기도 하지만,
쿠데타의 과정 중에 일부 호족세력들의 재편이 이루어졌고, 
서경 천도를 추진하면서 귀족들을 압박하여 왕권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다.

태조가 나라를 얻기 위해 뿌렸던 씨를 자식들이 거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 자업자득, 권력무상, 공수래 공수거…

*왕식렴

태조의 사촌 또는 6촌 동생이라고 한다. 
뭐가 되었건, 태조가 이복형제도 없는 외아들이었으므로 친동생과 다름없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왕 륭 일가가 궁예에 투항할 때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태조의 쿠데타에도 일익을 담당한 듯하다.
태조가 평양을 수복한 후 그 관리를 맡았으며, 이후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혀 신임을 얻었다.
북방은 태조의 기반이자 배후로서 극히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그 관리를 총괄하는 왕 식렴의 정치적 위상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통일 전쟁에도 깊숙이 관여하였으며, 유 금필 등의 공신 또는 호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한 듯하다.

기반이 미약하여 호족들을 통제하기 불가능했던 혜종은,
또 다른 호족 왕 규와 제휴하여 왕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왕 규는 가장 큰 위협인 정종 형제를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사연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정권을 잡은 외척이 왕실을 핍박하는, 전형적인 세도정치의 모습이었으므로,
왕실의 어른인 왕식렴이 보기에 영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정종 형제의 반격으로 쟁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혜종보다는 정종이 왕실을 위해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왕식렴의 개입은 정쟁의 교착 상태를 일거에 깨뜨렸고,
혜종의 갑작스러운 병사와 왕규의 어설픈 반란 시도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기록을 만들었다.

정치의 전면에 나선 왕식렴은 정종을 왕위에 올린 후,
나라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자신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하였는데,
천도는 난맥상인 고려의 지배체제를 일거에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사업이기도 하였다. 
예상대로 수 많은 난관들이 발목을 잡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은 민심의 이반과 호족들의 비협조 내지 반발이었고, 
결국 정종의 이상한 발병과 왕 식렴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추진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정종의 발병 원인이 천둥소리라는 황당한 이유인 것으로 보아,
왕식렴도 곱게 죽은 것은 아닌 듯한데,
평양의 공사 현장에서 아들이 죽는 바람에 상심하여 죽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독살이나 암살 같은 보다 은밀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혜종기가 왕 규의 시대라면 정종기는 왕식렴의 시대라 할 만 한데, 
왕 식렴의 기존 위상과 강력한 군사력은 정통성이 빈약한 정종을 떠받치는 힘이었으므로, 
그의 위세는 혜종기의 왕 규를 능가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서경 천도가 이루어졌다면, 
원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왕 식렴을 종주로 하는 왕조를 여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난세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기존 호족들은 물론 또 다른 야심가인 광종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혜종기를 방불케 하는 쟁투를 불렀을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광종의 승리였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으므로, 
왕 식렴과 정종은 광종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식렴,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다 간 난세인이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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