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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4일 (수요일) 4:17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거란의 3차 침입, 귀주대첩

고려 : 거란의 3차 침입, 귀주대첩

제 3 차 여요 전쟁

2차 여요전쟁이 마무리된 후,
오랜만에 임금다운 임금을 맞이한 고려 조정은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양 규에게 집 나간 개새끼 취급을 받았던 거란 하늘의 아들도 정신이 없었는지 한동안 조용하였는데,
한 2–3년 지나 좀 살만해지자 다시 고려를 찝쩍대기 시작하였다.
2차 침입 시 철군의 명분이었던 현종의 친조를 요구한 것인데,
왕의 친조는 완벽한 속국을 의미하므로, 당시의 양국 관계상 가당치도 않은 요구였다.
따라서 고려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왕의 입조를 거부하였고,
이에 열 받은 거란 천자는 친조를 안 하려면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강동 6주는 고려가 복속을 조건으로 권리를 인정받은 지역이므로 이놈들의 요구가 아주 억지는 아니었으나,
이미 전쟁까지 치른 마당에 옛날 조약을 들먹인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아무리 지 편한 대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게 천자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하더라도, 나름 영민하다는 평을 듣고 있던 거란 성종이 이 정도 이치를 몰랐을 리는 만무하므로
결국 다시 한 번 붙어보자는 이야기였다.

고려의 조정은 파국만은 피하기 위하여, 
비록 친조는 안했어도 열심히 사신을 보내어 마음에도 없는 충성 맹세를 해대었으나,​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있던 전직 닭 쫒던 개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점점 전운이 짙어지자,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등 또 한 번의 경천동지에 대한 대비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묘한 시기에 고려에서 발생한 최초의 무신정변은,
거란의 천자를 살점이 두둑한 뼈다귀를 발견한 배고픈 개새끼처럼 만들었으나,
내공 충만한 고려의 명군 현종에게 그 정도의 변괴는 자신의 절대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내정의 자신감은 외교의 자존심으로 나타났고, 마찰로 이어져, 양국관계는 서로 마주보며 달리기 시작한 기차와 같은 형국이 되었다.
강동 6 주를 둘러싼 국경지역의 충돌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었고,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던 현종 9년, ​마침내 대규모 전쟁이 불을 뿜었다.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평양성의 수호자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단호히 맞섰는데,
강감찬은 양규의 얼이 깃든 흥화진에서 강물을 막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태반을 수장시켜버렸다……가 아니라, 수공으로 한겨울에 갑자기 불어난 물에 당황한 거란군을 기병으로 요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귀주대첩이 아니라, 흥화진 대첩이라고 불리는 3차 침입의 첫 싸움으로,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의 승리는 아니었고, 본격적인 전투를 앞둔 양군의 상견례 수준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첫 싸움부터 물을 잔뜩 먹어 열 받은 소배압의 단독 판단이었는지는 모르나, 거란군은 강동 6주는 들르지도 않고 바로 개경으로 직행하였다.
저항이 심한 곳은 우회하여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유서 깊은 유목민 군대의 전략을 또 써먹은 것으로,
창의력 없는 종자들의 무식한 전법이기는 하였으나, 이놈들의 참으로 무식한 기동력과 결합되면,
가공할 파괴력을 나타내는 전법이기도 하였는데,
강감찬은 별동대를 파견하여 이놈들을 각지에서 요격하며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하였으나,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이 소 같은 놈들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래서야 개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몽진이라면 치를 떠는 현종을 위해, 
역대 언제나 한반도 최강이었던 동북면 병력을 개경 수비을 위해 파견하였고,
일 만의 철기병을 파견하여 거란의 후위를 끊고 견제하게 하였다.
그동안의 시련으로 명군의 풍모를 확실하게 갖추게 된 현종 또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서는 깊으나 역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정주민 전통의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개경 주변을 폐허로 만들고 식량의 씨를 말려버린 후 개경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돌격 앞으로만 외치며 달려온 소배압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빈집이 아니라 의외로 방비가 단단해 보이는 개경이 나타났다.
이리 재고, 저리 찔러보았으나 개경은 요지부동이었고.
한 달 넘게 쌀 한 톨 없는 폐허 위를 배회하던 소배압은 나름 기만전술을 쓴답시고, 
퇴각을 위장하여 고려군을 안심시킨 후 빈틈을 노리고자 하였으나,
이미 완전히 명군이 된 현종은 이를 간파하였고,
자신의 근위병까지 차출하여 거란의 척후병을 몰살시켜 버리는 철벽방어를 보여 주었다.
결국 쓰레기통을 뒤지다 엉덩이를 차인 똥개 꼴이 된 소배압은 별 수 없이 철군 길에 올랐고,
이에 따라 거란군의 운명은 민족의 위인 강감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

강감찬은 요격을 위해 흩어져 있던 기병들은 물론이고 어중이와 떠중이를 포함한 잡병들까지 닥닥 긁어모아 총 20만 여의 병력을 귀주로 집결시켰다.
거란군에 대해 일단 수적 우위를 확보한 것이었으나,
불과 십 수 명의 기병이 수천으로 구성된 보병부대를 패퇴시키기도 하던 시대였으므로,
비록 상가집 개꼴이 되긴 하였으나, 
전투로 단련된 10만에 가까운 거란 궁기병은 막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고,
고려군은 훈련이고 뭐고 없는 잡병들이 상당수 포함된 보병 중심의 군대였으므로,
수적 우위가 전력의 우위로 바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농성전이라면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할 수도 있으나, 굶주린 소배압이 공성을 할 리는 없었고,
그냥 통과해버리면 기껏 길목을 막은 의미가 없으므로,
강 조의 데자뷰 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감찬은 고민 끝에 모처럼 잡은 승기를 놓지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최대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귀주성 앞에 포진 하였다.
배고파 죽겠는데, 겁도 없이 회전을 걸어오는 고려군을 본 거란군은 주저 없이 달려들었고.

2차 침입 때의 경험도 있고 해서, 
또 한 번 굶주린 늑대와 양떼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강감찬은 강 조와 달랐다.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며 적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적을 압도한 것 또한 아니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돌격하고 이를 악물고 격퇴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수일간 반복되었는데,
이러한 격전에 서로 어지간히 지쳐갈 즈음 갑자기 철기병 일 만이 나타났다.
이들은 거란군의 후미를 끊고 견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김종현의 특임부대였는데,
그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이제야 나타났는지는 모르나,
나타나자마자 30만이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전장으로 돌진하였고,
원래 임무 그대로 거란군의 등짝을 쪼개버렸다.
팽팽한 국면에서 철기병 일만은 엄청난 변수였으며, 
이들의 활약을 본 고려군은 총돌격을 감행하여 적의 주력을 두들겼다.
이 앞뒤의 공격에 거란의 진형은 무너져 버렸고, 각개격파 당하기 시작하였는데,
쓸데없이 배수진을 치고 있었던 관계로 퇴로마저 막힌 거란군은,
강민첨에 의해 토끼몰이를 당하였고, 반령 벌판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이어진 섬멸전에서 거란은 최고 지휘관 상당수가 전사하였고, 시체로 벌판을 뒤덮었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남긴 채 ​불과 수천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0만의 거란 궁기병이라는 당대 최강의 전력을 회전으로 궤멸시키며,
강 조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한 ​고려군, 이 순간만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지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거란의 하늘이라도 이번만은 간담이 서늘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그 이름도 찬란한 귀주대첩이다.
이 위대한 승리로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은 사실상 마감되었으며 이후 동북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고려의 전성기가 활짝 열렸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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