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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2월 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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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15대 숙종, 별무반을 편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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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공 왕 희.
문종의 세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과단성이 있어 아버지의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하는데, 다들 영특했던 형제들 사이에서 유달리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을 보면,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나,
그게 무엇이든 문종이 당시로는 상당한 나이인 64세까지 장수하였고,
위로 형이 둘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다음 대 왕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팔자인지라,
원래 병약했던 큰 형이 즉위한지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작은 형이 뒤를 이었는데,
그 다음 대를 이어 가야 할 태자가 제 큰아버지를 닮았는지 어릴 때부터 골골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왕위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부자 상속보다는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어왔던 고려 왕실의 관행상,
그의 야심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었고 조야의 인심 또한 그러하였으나,
나라를 순리대로 이끌어 평온무사한 고려를 만들었던 작은 형이 46세로 사망하면서,
뜻밖에도 소아 당뇨병을 앓고 있는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였다.
이는 나름 훌륭한 정치가였던 선종이 행한 마지막 정치 행위라기엔 믿어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는데,
설마 했을 계림공이 분노에 치를 떨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결과는 결과고, 어짜피 오래 살 애도 아니었으므로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선종이 이러한 선택을 한 이면에는,
자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밉살맞은 동생보다는 똑똑해서 더 안쓰러운 자식에게 마음이
가는 평범한 아비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왕위 계승이라는 고도의 정치행위에서 정치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아무래도 계림공의 등극으로 가장 많은 손해를 보게 되는 인주 이씨의 심모원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숙종은 다른 제왕들과 다르게 평생 단 한 명의 아내와 해로하였는데,
이 행운의 여인은 왕자 시절 맞이했던 유씨로 인주 이씨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위치가 왕위와는 거리가 있어 인주 이씨의 사정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데,
뭐가 되었건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면 기존 외척 세력의 축소는 뻔한 상황이었으므로,
권력의 속성상 인주 이씨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를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을 어찌했는지는 모르지만, 
인주 이씨는 누가 보아도 불합리한 11살짜리 난치병 환자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자리까지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문제는 당시가 인슐린이 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당뇨병이 왕을 가릴 리가 없으므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이의 건강은 자라면서 점점 악화되기만 할뿐 호전될 기미는 없었고,
급기야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꼴이 된 인주 이씨 좌장 이자의는 또 한 번의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헌종보다 더 어리고 튼튼한, 자기 누이의 소생 한산후 왕윤을 다음 대 왕위에 올려 가문의 무궁한 영광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은 피차일반인지라,
이자의의 거사를 탐지한 계림공은 궁궐로 병사들을 보내어, 옥쇄가 탈취되기 직전에 이자의를 척살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짧았지만 격렬했던 정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계림공은 국정을 장악한 지 삼개월 만에 양위를 받아 1095년 왕위에 올랐는데,
계림공 입장에서는 원래 자기 자리를 찾은 순리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것 또한 사실이므로, 
유교적으로는 어쨌든 패륜이었다.
다행히 당시는 지랄 맞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교의 지배력이 그다지 크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왕을 제 집 청지기처럼 취급하던 발칙한 외척의 그간의 행태 또한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으므로,
대부분의 신료들은 양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정치적인 혼란도 없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일 또한 아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카가 일찍 병사하여,
조선 시대의 세조와는 달리, 따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42세라는 느지막한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왕실의 영원한 멘토, 대각국사 의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였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능력들을 발현시켰는데,
혼인으로 얽힌 문신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6촌 이하의 근친혼을
금지하였고,
아우 의천의 제안으로 주화도감을 설치하고 해동통보를 비롯한 각종 주전들을 유통시켰다.
남경에 주목하여 현재 청와대 자리에 궁궐터를 조성하였으며,
기자 전래설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카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왕 노릇을 하는 형이 부러웠는지,
동생인 부여후 왕수가 다음 차례는 자기라는 듯이 공공연히 세력을 모으자, 괘씸죄로 잡아들여
귀양을 보냈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이는 자기가 한 짓과는 관계없이,
동생보다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제왕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어찌 되었건 그간 안일하게 보일 정도로 무사태평했던 고려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셈이었는데, 이 바람은 여진에도 불었는지 동여진이 오랜만에 침략을 해왔다.
거란의 그 거창했던 침략도 물리쳤었고, 그간 착실히 국력을 쌓아 강국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던
고려라면,
이깟 북방 오랑캐의 침략 정도는 가볍게 격퇴했어야 정상일 터인데,
그 동안의 평화가 너무 길었음인지, 
고려는 뜻밖에도 요새라는 정주에서 패하였고, 이어진 윤 관의 여진 정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예전의 찌질했던 여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되면 체면도 체면이지만,
그동안 선대가 힘겹게 이룩했던 동북아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이 뻔하므로,
나름의 능력자 숙종은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고,
윤 관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병중심의 신기군, 보병중심의 신보군, 승병 중심의 항마군 등 도합  30만으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의 뿌리를 뽑게 하였다.
여진의 팽창을 억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는 했으나, 전성기인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도 30만은 과하였는지,
백성들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다고 할 정도로 징용과 징병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당시 인구에 대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전통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한반도의 특성상,
30만을 징집했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공동화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전비와 인력을 제공해야 했던 문벌 귀족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과장이든 아니든 국력을 총동원한 것은 맞을 것이고,
세금 좋아하는 부자는 없으므로 저항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는데,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던 고려에서,
정통성에 흠집도 있는 숙종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고.
결국 그는 말년에 반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단 진압은 하였는지,
자기 치세의 백미가 될 여진 정벌을 위하여 서경에 있는 동명왕 묘를 참배하였다.
하필 동명왕인 것으로 보아 이참에 고토의 회복까지 노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더니, 
안타깝게도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이 들어 수레 위에서 죽고 말았다. 1105년 향년 52세였다.

10년 남짓한 재위의 마지막이 객사라는 것이 아무래도 석연치는 않은데,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내외에 깔려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독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조카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원죄로 인해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고
조선의 세조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손을 써서 조카의 생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었고,
만일 이자의의 의도대로 되었더라면, 인주 이씨의 세도가 더 일찍 시작되어,
유명무실한 왕권과 세도가의 사리사욕을 위해 존재하는 조정이라는 고려 후기의 한심한 상황이 일찌감치 펼쳐질 수도 있었다.
또한 헌종은 단종과 달리 건강상 애초에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아이였고,
그대로 놔두었어도 어차피 얼마 더 살지 못할 운명이었으므로,
숙종을 인면수심의 권력의 화신처럼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이자의를 제거하여 인주 이씨의 세도를 막고, 바로 왕위에 올라 정정 불안을 잠재웠으며,
정체기에 접어들려던 고려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그동안 구두선으로만 존재하던 고토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숙종,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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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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