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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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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17대 인종, 요승 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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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해, 이자겸의 둘째딸 순덕왕후의 장남으로,
1122년 아버지 예종이 고려왕들의 평균 사망 나이인 45세에 서거하였을 때, 14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 군주는 정정불안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절대왕권과 인연이 없던 고려는 그 위험도가 더 높았으므로,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겨 이를 경계한 바
있었고, 
그의 자손들도 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고려 왕실에서 형제상속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예종은 그냥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어버렸다.
이는, 그동안 형의 눈치만 보았으나 그래도 설마 하던 동생들에게는 만행에 가까운 처사였으므로,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정정이 불안해지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웠는데,
특유의 카리스마로 나라를 이끌며 고려 황금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꽃 피웠던 나름의 명군 예종은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주 이씨를 외척세력으로 복원시켜놓은 바 있었다.​
인주 이씨의 좌장 이자겸은 외손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즉위에 어려움을 겪자, 
외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명감…. 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겠으나,
독단으로 인종을 즉위시킨 후 권력 투쟁을 전개하여 여타의 불만 세력들 제거하였다.
이로써 예종의 마지막 의도는 관철되었고, 자신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으나,
영원한 고려의 대주주인 문벌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눈꼴시고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자겸은 정란 공신급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
자신의 힘의 원천인 둘째딸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어린 왕이 어떻게 성장하고 누구에게 장가를 가느냐에 따라, ​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공백기 권력이라는 한계 또한 가지고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줌의 권력이라도 노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권력자들의 속성이고,
이자겸처럼 이미 한 번 몰락을 경험했던 자들은 그러한 경향이 심하였는데,
이자겸이 골똘히 생각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외척질이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남아 있는 셋째 딸과 넷째 딸도 왕비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하였다.
현대에서도 인기 있는, 소위  정략결혼을 추진한 것이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권력 강화 수법이었겠으나,
이 경우는 인종의 모후가 이자겸의 둘째딸이었으므로, 
친 이모들이 조카와 결혼하는 것이 되어, 촌수 계산만으로도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자겸으로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적들의 의표를 찌르는 회심의 한 수라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개 족보에 가까운 당시 왕실 결혼관습으로도 해괴한 일에 속하였으므로,
이자겸을 제외한, 일반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괴사가 되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 자겸은 자신이 가진 실력을 총동원하여,
문벌귀족들의 공격과 결혼 당사자들의 민망함을 누르고 이를 관철시키고야 말았는데,
조정의 권신들에게야 그냥 정치싸움이었겠지만, 막상 결혼을 해야 했던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어찌 되었건 이로써 이 자겸의 권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고,
더불어 인주 이씨의 세도정치도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되어,
이자겸의 일곱 아들들은 정계와 종교계를 막론하고 요직을 차지하여 국정을 농단하였고,
그와 조그마한 연줄이라도 있는 자들도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여 떵떵거리게 되었으며,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일상이 되었음은 물론 왕실의 권위가 공공연히 무시되는,
세도정치의 전형적인 부작용이 나타게 되었다.

​이 꼴을 본 18세 질풍노도의 소년왕은 크게 분노하였고,
이 자겸에게 소외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하여 성급하게도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여진 정벌의 히어로 척준경까지 포섭하고 있던 노회한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왕파는 선제공격에도 불구하고 척준경의 무력에 무너져버렸고,
궁궐은 불타올랐다.
잘 곳마저 없어진 왕은 사춘기 소년답게 금방 의기소침해졌는지,
제 발로 외갓집으로 걸어가 맥없이 백기 투항하고 양위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 자겸의 완승이었다.

인종의 양위제안을 받은 이 자겸은 왕이 될 꿈에 부풀게 되었고,
18자 위왕설을 퍼뜨리는 등 왕이 되기 위해 움직였고, 결국 인종을 독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이제는 서방님이 된 조카의 고난이 안쓰러운 이모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여 아버지를 좌절시켰다고 하는데…..다 믿기는 어렵다.
전쟁의 당사자인 적국의 왕도 죽이지 않고 통치에 이용하는 것이 정치의 상례인데,
이미 양위 의사를 밝힌,
가치 높은 볼모나 마찬가지인 인종을 죽여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자겸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하였을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진실이야 알 길이 없으나,
이자겸의 왕 되기 작전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 삐걱거렸던 모양인데,
설상가상으로 무력 담당 척준경과 사이가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인 놈들끼리 싸우는 도중,
이자겸의 하인들이 주둥아리를 잘못 놀려 척준경을 분노케 한 것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뭔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 것도 아니고,
왕좌를 노리는 사람이 그만한 일로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전력을 날렸을까?
자세한 속사정이야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시련을 겪어 한층 성숙해진 소년은 적 분열이라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척준경을 포섭하는 만만찮은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말을 바꾸어 탄 척준경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이자겸을 선제공격하여,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제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왕 앞에 무릎을 꿀리는 명성에 걸 맞는 위용을
보여주었다.
여포를 빼앗긴 동탁 꼴이 난 이자겸은 자신의 반역 의지를 극구 부인하고, 드높은 충성심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인종이 묘호대로 어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예상과 달리 극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자겸은 귀양살이 중 그 지방의 말린 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비굴하지 않겠다는 뜻의 굴비를 적어 올려 영광굴비의 어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뻥이라 한다.

부녀의 천륜보다는, 조카와의 부부의 정을 따랐던 이모 둘은 비록 폐비가 되기는 하였으나,
저택과 노비 등 위자료를 넉넉히 받는 호사를 누렸다고 하는데,
이 부녀들을 배출했던 인주 이씨 가문은 별로 운이 좋지 못하여 그야말로 철저히 몰락하였으며,
이후 역사에서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자겸, 그가 과연 왕조교체를 꿈꾸었을까?

​한편 이자겸 타도의 최고 수훈갑 척준경은 공신각에 초상이 올라가는 광영과 함께 세도가가 되었으나, 그 기간은 짧았고, 서경파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유배되었다.

​*척 준경.
경이적인 무예로 국가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으나,
무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의 칼의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끝내 버려지고만
비운의 무장이었다.
그를 보며 그의 후배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 자겸을 때려잡고 비로소 제대로 된 왕 대접을 받게 된  18세의 인종, ​기뻤을까?
아직 어린 나이었으니 철모르고 좋아했을 수도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는 늑대가 출몰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정권상층부에서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이었으므로,
당시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카더라` 수준의 저녁 술 안주감에 불과하였을 것이나,
정치적으로는,
외척과 문벌 간의 한판 대결에서, 태생적으로 왕권의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문벌 귀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심각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왕의 처지가 더 악화되었다는 뜻도 되므로,
한참 예민한 시기의 소년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다.

묘청은 이자겸의 난이 끝나고, 
소년 왕이 폐허 위에서 망연자실하며 서있던 시기에 출현하였는데,
이 출신이 모호한 인물은 조정의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정지상 등에게 접근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음양비술에도 조예가 있었다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하나였던 정지상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속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천도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므로 이전에도 툭하면 추진된
바가 있었고,
당시에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지상은 이 달변의 인물을 왕에게 소개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정지상 등의 비주류는 옮기기만 하면 천하가 저절로 앙복할 것이라는 등의 헛소리에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적인 정치공학적 의도가 강하였겠지만,
이자겸의 난 한복판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한 목숨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결국 믿을 놈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던 소년 왕에게,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언변 좋은 도인은 메시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외로운 소년은,
묘청을 자신의 처지를 긍휼히 여긴 열성조께서 보내주신 인물로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청을 왕사로 삼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였으므로, ​
서경파는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다.

묘청은 이적을 조작하는 등의 치졸한 수법으로 아직 어린 왕을 홀리며 서경천도를 추진하였고,
서경에 궁을 건설하고 성을 쌓게 하는 등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몇 차례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마다 문제가 되었던 과중한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과
기존 개경세력들의 반발이 발목을 잡았다.
대 역사를 시행하다 보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발생되는 각종 사건 사고는 ​묘청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모면을 위해 남발하는 요설들은 반복될수록 약발이 떨어져 갔다.
적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고 우군마저 의심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린 묘청은,
특단이 대책으로, 임금을 서경으로 모셔 황제국을 선포하고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한 듯하나,
이 또한 개경세력들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이쯤 되면 ​천도는 물 건너간 것이고 실각 또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일반적인 도인이라면 심산유곡으로 물러나 심신을 닦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나,
이 기이한 인물은 포기하기는커녕 후세의 단재 선생을 감복시킬 ​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추종자들을 모아 서경을 국도로 하는 황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국호는 대위, 연호는 천개, 국시는 금나라 정벌. 군대는 강아지 이름 비슷한 천견충의군.
즉 위나라를 만든 것인데,
군대 명칭의 뉘앙스나 황제의 자리를 비워둔 것 등으로 보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반란을 일으킨 묘청은 순식간에 자비령 이북을 장악하였고,개경을 급습하여
왕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허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실제적인 능력은 별로 없었는지, 
시행을 하지는 못하였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진 개경은 발칵 뒤집혔고,
개경 문벌세력은 이번 기회에 반대파를 박멸하고자 하였으므로, 
어느덧 다 자라 20대 후반이 된 젊은 왕은 다시 볼모신세가 되었다.
대군을 이끌게 된 김부식은 개경에 남아있던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을 도륙한 후 
서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는데,
위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할 추종세력들은,
의리도 없이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항복을 하여 묘청의 영향력이 별 볼일 없음을 증명하였다.
당황한 반란군은 내분이 발생하였고, 
어이없게도 묘청의 목을 잘라 협상을 시도하였는데,
김부식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묘청의 목을 가지고 온 사자를 투옥해 버렸다.
이 꼴을 본 새로운 반란군 지도자 ​ 조 광은 성급하게 묘청을 죽인 것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왕 죽을 몸 여한 없이 싸워나 보자며 대동강 가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다.
고려의 제 2수도이자 서북방 방어의 요충 서경은,
명성 그대로 누가 보아도 상대가 안 되는 김부식의 대군을 맞아 1년여를 버티어 냈으나, 
식량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하였으므로, 
화살에 맞아 죽는 군사보다 굶어 죽는 군사가 더 많아졌고 결국 함락되었다. 
조 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부는 모두 자결하였다.​
김부식이나 조 광이나 군사적 능력이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묘청의 난의 개략적인 전모를 보면,
시작과 진행과정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찌질하기 이를 데 없어, 
도대체 어느 부분이 신채호 선생을 매혹시켰는지 알 수가 없는데,
오히려 이 사건 이후 서경의 지위 격하와 함께 조정에서 서경세력이 씨가 말라버렸고, 
사원세력도 정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영원한 여당, 문벌 귀족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모두 소멸되고 마는 지랄맞은 상황이 되었으므로,
골수 보수화 된 고려 조정에 이상주의자들이 발붙이기는, 고목나무에 꽃 피기를 바라는 꼴이 되었고,
왕의 지위가 조정자에서 얼굴 마담으로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진취적이며 자주적인 기상은 점차 사라지고, 현실안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유학자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조선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국권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단재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묘청의 난을 조선 일천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한 모양이나,
묘청 그 자체는 아무리 봐도 그냥 요승이었다 .​

​어찌 되었건 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인종은 다시 권신들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나 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체념하지 않고 예종의 아들답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듯하나,
친위세력의 씨가 마른 마당에, 
전통적으로 야당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 마저 사라진 조정에서,
이자겸에게 양위했던 전력이나 묘청을 끝까지 편들었던 ​실책 등을 가지고 있는 젊은 왕이,
기세등등한 문신 귀족들을 제어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이 시기 정국을 주도했던 김부식이 오리지날 개경세력이 아니라,
옛 신라계열 출신이라는 작은 틈바구니가 인종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까 ?

​김부식도 잘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침을 겪었는데,
정치보복이 두려워 퇴직을 신청하자, 
그마저 없으면 너무 외로워지는 인종은 그에게 우리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정치가나 군사전략가의 재능 보다는 학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김부식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의 유일한 치적을 만들어 주었다.​

​ 변변한 치적도 없이 한 평생 시달리기만 했던 인종은 38살이 되는 1146 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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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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