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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요일) 11:40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16대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고려 : 16대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왕 우
부왕 숙종이 객사하여 1105년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할아버지 문종처럼 남자로서 최고의 나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 후반에 왕위에 오른 것인데,
금상첨화로 그의 손엔 아버지의 비원이 담긴 30만 대군이 쥐어져 있었다.

예종은 아버지가 남긴 군대를 조련하여 1107년 17만 여의 대군으로 여진 정벌을 실행하였는데,
윤 관의 작전이 좋았는지 아니면 여진이 설마하며 방심을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초전부터 여진 추장들의 목을 베며 승승장구하였고 점령지에 성까지 쌓아,
서희의 담판으로 권리를 인정받은 압록강 이동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보하였다.

윤 관이 점령한 지역은 여러 이론이 있으나 함흥평야 일대는 확실히 포함된 듯하다.
그런데 함흥평야는 함경도지방의 유일한 곡창지대로서,
발해멸망 후 한반도 동북 지역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여진족에게는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기에, 정벌이 아닌 점령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용사 척준경의 활약이 없었다면 총사령관인 윤 관도 그 곳에 뼈를 묻을 뻔 할 정도로 여진족의
저항은 극렬하였고,
요충지라고 쌓은 성들도 그다지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수 없는 함락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
비교적 쉽게 요새화할 수 있었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초반의 성과에 취해, 윤 관에게 포상을 하는 등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던 고려 조정은 늘어나는 병사들의 희생과 전비에 당황하였는데,
여진은 화전 양면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동북 9성의 유지가 실익도 없이 정권에 부담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종은 별 수 없이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겠다는 립서비스에 위안을 찾으며 윤 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막대한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고도 영토는 한 뼘도 늘리지 못하고, 명목상의 종주권만을 챙겼던
거란 성종 꼴이 난 것이었는데,
거란과 달리 절대왕권과 인연이 없었던 고려의 태생적 한계 상, 예종의 처지는 거란 성종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자칫 왕의 책임론이라도 불거지면,
아버지가 역사의 오욕을 감수하며 겨우 확보했던 알량한 왕권마저 날려먹을 수 있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예종에게는 친위대적 성격이 강하고 전투를 체험한 강한 무력과 튼실한 재정이 남아 
있었으므로,
일단 윤 관을 희생양으로 하여 대신들의 입막음을 한 후, 정면 돌파를 선호했던 숙종의 아들답게
고려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자고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단으로는 교육만한 게 없으므로 예종은 교육에 주목 하였다.
당시 고려는 최 충의 9재를 비롯한 사설 교육기관의 난립으로 공교육이 초토화 되어 국자감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교육이 일부 특권층에게 독점되어 계급의 공고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문벌 귀족들에 대한 견제와 왕권의 강화라는 누대 고려왕들의 화두도 해결하고,
자신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예종은 9재를 모방하여,
국학에 일종의 강의반인 7재를 설치하며 공교육 살리기에 시동을 걸었는데,
그중 강예재가 무학 및 병법에 대한 강의였다.
일종의 사관학교였던 셈인데,
강의의 속성상 귀족들 보다는 소외계층에서 지원할 여지가 많았으므로 친위세력화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군대의 중간간부를 다수 확보하여 국가 군사력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으므로,
가히 양수 겹장의 탁월한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관학교 졸업생들을 위해 무과도 신설하였는데,
상대적으로 시험이 쉽고 뽑는 인원이 많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련의 개혁들이 향하는 방향은 누가 보아도 뻔하였으므로,
오랫동안 고려의 주인 노릇을 해왔던 문신 귀족들은 고비마다 격렬한 반발을 하였으나,
예종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무력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았고,
내친 김에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만들어 가난한 수재들이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학술 연구기관을 만들어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권위를 높였다.
또한 여진 정벌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서민층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일종의 약국인 혜민국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전염병 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현대 아악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을 들여와 신민들의 정서를 어루만지기도 하였고.
예종이 이러한 거창한 사업들을 거침없이 벌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현종 이후 축적된 고려의 재정이 얼마나 충실하였던 가를 알 수 있다.

사회개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예종은 화려한 팔관회를 열어 신민들과 잔치를 즐겼는데,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던 왕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 왕건을 섬겼던 김 락과 신숭겸을 위한 향가,
도이장가를 지어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켰다.

고려가 돈을 물 쓰듯 쓰며 전쟁의 후유증을 치료하고 있는 동안,
여진은 완안부의 아골타에 의해 통일이 되어 이라는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분열의 대명사 여진을 통일시키고 단기간에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성장시킨 아골타의 능력이
놀랍긴 하지만,
구원으로 보나, 지정학적 위치로보나 고려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예종은 천리장성을 보강하는 등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금은 천리장성의 보강에 신경질을 부리고, 외교문서에 고려를 아우로 칭하는 등 건방을 떨기는
하였으나,
이미 한 번 혼쭐이 나기도 하였고, 거란과 싸우기에도 바빴으므로 온건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의한 평화였던 셈인데,
고려는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그냥 적응하면 그만이었으나,
욱일승천하는 금의 기세에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던 거란은 입장이 달랐으므로 ,
이제까지의 고압적 자세를 버리고, 
고려에 홍화진 이북의 의주를 제공하며 금 정벌을 위한 지원을 애걸하였다.
그러나 고려입장에서는 거란이나 금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의주만 받아먹고 지원은 거절하였다.
일종의 등거리 외교였는데, 거란으로서는 분통터질 노릇이었겠으나,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는, 뭐가 어찌되었건 이 사건 이후 서북방 방어의 요충 의주가 영원히 우리 땅이 되었으므로,
상당한 외교적 성과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당시의 국제적 상황은 나라가 망해가던 거란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나,
송, 요, 금, 3강을 머리에 이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던 고려도 그리 편한 입장만은
아니었을 터인데,
머리 좋은 집안의 자손 예종은 이 복잡한 3차방정식을 성공적으로 풀어내었는지,
당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역대 최상이었다.
송에서는 고려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서하보다 높은 대우를 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거란이 맛이 간 상태였으므로, 사실상 최고의 대우였다.
송은 고려 사신의 시 건방도 참을 수밖에 없었으며, 재정에 부담을 줄 정도의 심한 무역역조도 감내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인생을 살던 예종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말년에는 향락에 빠졌고, 
종기가 발생하였는데,
외과 수술과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향년 45세, 1122년이었다.

17년간 재위하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고려의 황금기를 이어간 예종, 명군이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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