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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목요일) 2:46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무신들의 시대, 최초의 천민 출신 집정 이의민

고려 : 무신들의 시대, 최초의 천민 출신 집정 이의민

이의민의 조상은 월남국의 왕자였다고 한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왕자는 중국으로 탈출했고 어찌어찌해서 고려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인데,
고려에서의 생활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는지,
그의 자손인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 장수로 연명하였다.
상업이 발달했던 고려였으므로 소금 장수가 그리 나쁜 직업은 아니었을 것이고, 신분 또한 천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사원의 어여쁜  노비와 눈이 맞는 바람에 그 자식들은 종모법에 따라 갈 데 없는 천민이 되었다.

삼형제의 막내였던 이의민은 8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삼형제는 능력은 있으나 신분이 천한 젊은이들답게 사회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고, 
이러 저러한 사건 사고를 겪으며 자랐을 것이다.
이들은 결국 대형 사고를 친 모양인데, 
이의민은 두 형이 죽는 살벌한 고문에도 멀쩡히 살아남았고, 이를 눈여겨 본 안찰사 김자양이 경군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천품의 젊은이가 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까운 자상한 목민관의 선행이었는지, ​
아니면 모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리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수박을 잘하던 이의민은 이내 의종의 눈에 들었고 별장까지 승차하여 김자양을 흐뭇하게 하였다.
천민이 이만큼 출세했으면 개천에서 용 난 것이나 진배없으므로 늙으신 부모님도 기뻐했을 것이고,
그 또한 적성에 맞는 군무에 열심히 종사하며 나름 잘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신 정변이 발생하였다.​
정변 당시 그는 이의방이나 이 고보다 지위가 높았으나, 출신의 한계 때문인지 주동그룹에 끼지는
못했는데,
그 또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정변에 적극 동참하였고,
그 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폭발시켰는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여 금강야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변이 성공한 후에도 정권 쟁탈전을 벌이는 옛 부하들의 명을 받아,
왕을 죽이라면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라면, 눈에 화살을 맞는 악조건 속에서도 날뛰어야 했으나,
다행히 타고난 용력과 무예가 출중하여 여러 번 공을 세울 수 있었고,
상장군까지 진급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말단 군졸에서 시작하여 별을 네 개씩이나 단 계엄사령부 수뇌부의 일원이 되었으니,
자신도 흐뭇하였을 것이고,
당대 천민들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천민출신 병사들의 절대적인 충성도 받았을 것이고.​
전설에나 나올 법한 출세를 하고 정권에 일정 지분까지 확보한 이의민은,
남들처럼 부정부패에 열중하며 행복한 삶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난데없이 경대승이 나타나 하늘같은 정중부를 효수하더니,
바닥에서 출발하여 남들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한 자신을 마치 구악의 화신처럼 취급하였다.

경대승의 일차척결 대상에서 벗어나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의민은, 이러한 경대승의 적대에
당황하였을 것이나,
그 동안 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웬 천둥벌거숭이 같은 젊은 놈의 이해할 수 없는 철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자택에 칩거한 후 사병들을 동원하여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경대승 또한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슷한 짓을 하였으므로,
개경 시내에서 두 호랑이가 서로 마주 보며 으르렁거리는 형국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젊고 공세적인 경대승이 유리하였는지, 
이의민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서 고향 경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천민으로 출세하여 그만한 지위에 올랐고 상당한 부도 모았으니 별 미련은 없었을 것이다.
경대승이 명종을 겁박하건 말건 그건 신경 쓸 일도 아니었고.

개경에서야 천민으로 온갖 괄시를 받았지만 금의환향한 고향에서는 지역 유지 대접을 받았을 것이므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토벌에 대비하여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호족질을 하며 제법 잘 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대승이 병사하였으니 아무 걱정 말고 귀경하라는 명종의 서신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난세를 살아오며 다져진 그의 경험은 이를 쉽게 믿지 못하게 했고,
정권에 대한 욕심도 그다지 크지 않았으므로,
임금의 지엄한 명령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되자 명종은 정권을 욕심내지 않는 그의 담백한 성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사심 없이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이의민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정과 중방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갈량을 삼고초려했던 유비마냥 이의민에게 매달렸다.
이의민은 임금의 정성에 감복했다기 보다는 경대승이 죽은 게 확실하고, 왕의 말을 들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보무도 당당하게 경대승이 초토시킨 무주공산에 입성하였다.
명종은 이의민을 유일하게 믿을 만한 동지로 생각하였는지, 열심히 벼슬을 올려주고 공신각에 초상까지 걸어 주었다.
이의민은 순조롭게 정권을 장악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이의민 개인으로 보면 그야말로 인간 승리요, 온 세상 모든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광영 중의
광영이었을 것이나,
까막눈에, 잘하는 게 싸움질밖에 없던 그는,
재상의 위치에 올랐어도,
비슷한 처지의 친구 두경승과 함께 대궐의 기둥과 벽을 부수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었고,​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신들의 문반직 겸임을 확대했으며,
학식이 필요하여 무신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던 관직에도 무신들을 등용하였다.
문신들은 말세를 한탄하였을 것이나 천민들이 다수 포함된 무신들은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한 일에도 게을르지 않아,
백성들의 재산을 수시로 수탈하였고, 양갓집 규수를 겁탈하는 취미도 만들었다.
그의 가족들도 가장의 본을 받아 포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아버지 덕에 조정에 출사한 그의 아들들은 쌍도자로 불릴 정도로 민폐가 발군이었다고 한다.

이의민을 불러들인 명종은 왕 되고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지도자의 자질이 없기는 왕이나 이의민이나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나라를 개혁하고 민생을 돌보고 하는 게 아니라,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마음 놓고 향락에 빠져들었으며,
개뿔도 없이 아첨에만 능한 환관들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힘을 잔뜩 실어주었고, 그들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였다.​
덕분에 경대승이 일부 복원시켰던 고려의 전통 질서는 다시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악몽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빼앗길 게 별로 없었던 천민들은 통쾌하였을 것이다.

​​ 명종과 힘을 합쳐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며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이의민은
황당하게도 십팔자위왕설에 심취하여 왕이 될 꿈에 부풀게 되었고,
집안에 두두리라는 귀신을 모시는 사당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빌었다고 하는데,
끝없는 그의 욕심에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집정이 되어서도 천민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그에게 고려는,
아무리 성공했어도 항상 외국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므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서 신라부흥을 기치로
김사미와 효심이가 민란을 일으키자,
두두리신이 응답한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과 내통하며 반란의 성공을 기원하였고, 
아들을 토벌대의 대장으로 삼아 군수품을 지원하는 등 반란이 성공하도록 나름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천민들이 주축이 된 효심이와 사미군은 정규군을 당해 내지 못하여 이의민의 꿈은 좌절되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명종의 목을 취할 수 있었고, 
인사권과 군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이의민이 꼭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써야만 했을까?
당시나 이후에도 이에 대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최충헌이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작했다는 설도 있고,
반란군에게 뇌물도 받았었다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내통이나 지원을 했다기 보다는,
무지렁이들의 꿈틀거림이 안쓰러운 단순한 동정심이었다는 설도 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의민이 천민 친화적인 지도자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이의민의 몰락은 비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의민의 아들 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강탈하자, 열받은 충수가 형에게 일렀고,
형인 최충헌도 같이 열받아 이의민의 목을 따 효수하고 삼족을 멸하였는데, 
다행히 종손인 이우원이 정선까지 탈출하여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에선 용맹하고 정치에는 조심성 많던 이의민이, 
그깟 비둘기 때문에 10년이 넘는 권세가 무색하게 간단히 몰락해버린 것이 참으로 어이없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귀족들의 나라 고려에서 천민이 그만큼 이루고 누렸으면, 별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드문 천민 출신 ​집권자.
비록 그 끝은 ​ 비극이었으나 독특한 시대와 어울린 그의 분투와 성공은 당대 천민들의 귀감이었고,
후대에 비참한 삶을 강요받았던 모든 이들에게 전설이 되기 충분하였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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