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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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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25대 충렬왕, 황제의 막내 사위

왕 개명
원종의 맏아들이다.
이 양반은 썩 달갑지 않은 의미의 처음이 많은데,
우선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된 첫 고려 국왕이고,
성종조에 종묘를 설치한 이래 묘효를 부여받지 못한 첫 번째 왕이며,
시호의 첫 자에 ‘충’자가 들어가는 첫 번째 왕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별 재미없으니 그만하고….

1260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271년 원나라에 입조하여,
1274년 5월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39살 아저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의 막내 딸과 정략 결혼하였으며, 이어 6월 원종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는데,
즉위를 위해 귀국할 때, 세조구제가 무색하게도, 머리를 변발하고 옷을 몽골식으로 입어 백성들을 뜨악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판 오렌지족이었던 셈으로, 고려 백성들은 이 꼴사나운 왕을 보며 혀를 끌끌 찼겠으나,
그래도 황제의 부마였기에 제국 최고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이 있었고,
원의 사신이나 다루가치들 뿐만 아니라 상국의 벼슬아치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름 권위 있는 왕이었다.

충렬왕의 서열은 원의 제후왕들 중 7위였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속국의 국왕이라는 처지에는 변함이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의 닦달에 일본 원정군을 파견해야 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점령전을 수행할 때, 일본에게 송과 관계를 끊고 원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는데,
당시 십대에 불과했던 일본의 쇼군은 이를 거부했고, 이어진 수차례의 협박에도 무시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이에 짜증난 쿠빌라이가 일본을 징치하기 위해, 1274년, 고려를 앞잡이 삼아 일본으로 쳐들어 갔는데,
몽골놈들이야, 이 겁대가리 없는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새로이 천명을 받은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각인시켜주고, 막대한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는 호쾌하고도 흐믓한 일이었겠으나,
전비를 부담하고 선봉까지 서야했던 고려 입장에서는, 잘 되든 못 되든, 남는 것도 없이 일본의 원한만 사게 되는 지랄맞은 전쟁이었다.
전투는, 마치 유럽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무사도의 일본군과 화약무기까지 가진 전투 전문가들의 싸움이었기에, 연합군이 초장부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양상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개는, 고려를 비롯한 몽골의 침입을 받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늘상 있던 일이므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느닷없이 태풍이 불어와, 고려 백성들이 피똥을 싸가며 수년동안 건조했던, 연합군이 타고 온 배를 왕창 부셔버린 것이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연합군은 졸지에 섬나라에 고립되어 버렸고. 당장 보급이 난망하게 되었는데,
망가지고 없어진 그 많은 배들을 빠른 시간 내에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감해 하던 연합군은 결국 덜 부서진 배들을 수리하여 몸만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몽골놈들이야 황당했겠지만, 피 흘리며 싸워 이겨봐야 별 볼 일 없었을 고려군은 차라리 이렇게라도 전쟁이 끝나는 것이 반가웠을 것이다.
따라서 1차 원정은 패전이라기 보다는 자연재해로 인한 정전에 가까웠는데,
이리되자 약이 오른 쿠빌라이는 1279년 남송을 완전히 점령한 뒤,
1284년 옛 남송의 병력 10만까지 포함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2차 침입을 명하였다.
잠재적 불온 세력도 처리하고 말 안 듣는 왜놈들도 징치하고, 양수겹장의 묘수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그건 님 생각이고,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이번에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의 선전으로 인한 초전의 유리함과는 별개로,
웬수같은 태풍이 또 불어와,
주력인 남송의 병력은 배의 침몰과 함께 다수가 배에서 내려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였고, 
곤죽이 되어 겨우 상륙한 병사들도 일본군의 적개심이 가득한 칼날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일본 애들도 일차 때 피 흘리며 제법 배웠던 모양이다.
14만의 연합군 중 생환한 병사는 3만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이에 열받은 쿠빌라이는 3차 원정도 계획했으나, 베트남이 더 열받게 하는 바람에 칼끝을 베트남으로 돌렸고, 
덕분에 일본은 태풍 때문에 이겼든 뭐 때문에 이겼든, 몽골의 침입을 두 번씩이나 격퇴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2차 전쟁에서, 몽골은 자체 동원한 병사나 자원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피해 또한 거의 없었으나, 
원정 준비에 피박을 쓰고 괜히 끌려가 칼춤을 췄던 고려나, 칼춤도 제대로 못 추고 죽는 역할만 했던 옛남송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어이없고 억울한 죽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1290년, 카다안이 침입하였다.
백성들 집구석에서 밥이 끓든 죽이 끓든, 나름 고귀한 신분을 즐기며 왕 노릇을 하던 충렬왕에게 수난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침입의 배경을 보면,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부카를 때려잡고 대칸이 되긴 하였으나,
정력왕 징기스칸이 줄줄이 내 질러 논 자식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자손들이 나름의 지분을 주장하며 이전투구를 일 삼는 몽골의 태생적 정치구조 상,
승자가 되었다 하여, 제압한 반대파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저항하는 자들을 일일이 쫒아 다니며 목아지를 비트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지배자인 5촌 조카 카이두의 저항이 가장 골치가 아팠고 위협적이었다.

카이두는 우구데이칸 국의 실질적인 창업군주로서, 평생 쿠빌라이를 집요하게 괴롭혔는데,
이리크부카의 편에 섰던 카이두는 내전의 승자 쿠빌라이가 압박을 가해오자,
초원 도둑놈들의 후손답게 아리크부카의 아들들을 포함한 반 쿠빌라이 세력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에는 자기도 징기스칸의 피를 일부 받았다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수도 카라코룸을 위협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전설적인 명장 바얀의 활약과 노익장을 과시하는 쿠빌라이의 전술에 말려 싸우는 족족 패하였고,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 후에도 세력이 꾸준히 줄어들었으며,
1301년, 이를 참지 못하고 최대 규모로 진행된 최후의 전투에서는 카이두 자신마저 부상을 입고 허무하게 사망하여,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인생이 무상하기는 매한가지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증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몽골 역사에서 되풀이 된 흔한 반란들 중의 하나인데,
엉뚱하게도 만주지역의 카이두 잔여세력이 쿠빌라이에게 토벌되면서 고려에 불똥이 튀었다.

카다안은 카이두를 지지했던 동몽골 지역의 군벌이었는데,
이놈들은 토벌군에게 박살난데다 퇴로까지 막혀 제 소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옛날 강동성을 점령했던 거란 대요수국의 잔당들처럼 고려로 침입하였다.
카다안이 침입했을 때, 카이두와의 싸움에 한 팔 거들겠다며 한희유 등과 함께 몽골에 입조한 상태였던 충렬왕은,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전쟁 대비를 위해 급거 귀국한 후 마치 진짜 왕처럼 이것저것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알뜰하게 망가진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방어고 공격이고 간에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고,
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전문 경영인인데, 목숨까지 거는 것은 오바라고 생각했었..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전투가 시작되자 바로 강화도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아마도 니들이 싼 똥, 니들이 치워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같은 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이 강화도로 도주하자 개경의 수비책임자들 뿐만아니라, 서경유수까지 모두 왕을 따라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리되자 몽골의 토벌군이 도착할 때까지 고려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내 나라 내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갸륵한 관리나 장수는 천연기념물보다 찾기 어렵게 되었고,
카다안의 침입경로에 있던 백성들은 옛날 몽골 침략기처럼 말타고 칼든 도적놈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고려에 진입한 카다안 이 썩을 놈들은,
집단 강간에, 약탈에, 방화에, 학살에… 온갖 분탕질을 처대었으며, 처먹을게 떨어지면 인육으로 식량을 대신하기도 했다는데,
정규군도 아니고 비적 떼에 불과했던 이 놈들에게 처참하게 능욕당하는 고려,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이 한심한 꼴에, 쿠빌라이는 제 놈이 고려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혀를 끌끌 차며 군사 1만을 파견하여 이 카다안 염병할 놈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난한 뒤에도 개경에서 하던대로 놀기만 하였고,
지원군이 도착한 뒤에는 군량미도 부족한데 잔치를 열어, 몽골군을 이끌고 온 세도칸의 힐난을 받았다고 한다.
충렬왕의 이러한 태업에 가까운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세도칸은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는지 열심히 전투를 수행하여, 현재의 세종 시 근처인 연기에서 이 죽일 놈들의 주력을 격파하였고,
이에 승기를 잡은 토벌군은 한희유 등의 활약을 앞세워 잔당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는데,
충렬왕은 그제서야 강화도에서 기어 나와 개경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사실 개념상 다국적 거대 기업 몽골의 고려 지사장쯤 되는 충렬왕에게,
아무리 오너의 사위 신분이었다 해도, 진짜 왕 같은 책임감을 요구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충렬왕의 이러한 도를 넘는 찌질함을, 왕이되 왕이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 소심한 반항 내지는 고려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은 몽골에 대한 불만의 표현 등으로 합리화 하는 견해도 있으나,
백번 양보한다 해도, 현대의 전문경영인들도 사안에 따라 그 직책에 따른 책임을 지는데,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꼬박꼬박 세금 내고 부역을 바친 백성들을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 방치한 채, 저 혼자 안전한 섬구석에 틀어박혀 음주가무와 사냥에 탐닉했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를 떠나, 인간으로서도 실격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에 걸맞는 정치적 책임이 뒤따랐을 것이나, 쿠빌라이의 막내 사위 충렬왕은 그런 책임에서도 자유로웠다.

*제국대장공주
이민족의 왕과 결혼한 원의 유일한 황금씨족 공주로서,
방년 16세에 이미 이미 유부남이었던 39세의 아저씨와 정략으로 맺어졌는데,
아직 철들 나이도 아니고 철들 필요도 없었기에,
고려 왕비로서의 정체성 또는 역할에 대한 고민이나, 자신과 결혼해야만 하는 고려왕의 입장에 대한 고찰 따위 보다는,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늦둥이 딸로서의 자부심으로 가득차,
관료들에게 몽골풍을 강요하기도 하고, 놀기만 하는 충렬왕에게 정사에 힘을 쓰라고 충고하기도 하였으며,
축재에도 관심이 많아 고려의 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실크로드를 통하여 러시아, 아랍에까지 판매하였다고 한다.
반면 종놈이 능력 있는 주인댁 막내 애기씨를 모시고 사는 꼴이 되어버린 충렬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는 커녕 사려 깊은 아내의 내조 조차 기대할 수 없는, 남자로서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태자시절 맞이했던 조강지처 정화궁주를 공주와 동급으로 대우하거나, 총비 무비를 비롯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며 공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주제를 모르는 늙다리 영감의 어이없는 행각에 크게 분노한 공주는,
정화궁주를 유폐시키는 등 연적들과 그 자식들에게 마음껏 질투와 투기를 퍼부었는데,
동기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감히 어느 누구도 공주를 제어할 수 없었으므로,
대궐에는, 툭하면 서슬 퍼런 공주의 호통과 이어진 비명, 곡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 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했을 충렬왕은 사냥을 핑계로 시끄러운 집구석을 떠나 밖으로 돌았는데, 그때마다 무비를 동행하게 하여 공주를 더욱 열받게 하였다고 한다.
공주 입장에서 충렬왕의 이러한 작태는, 노예나 다름 없는 하찮은 속국의 국왕 주제에, 감히 금지옥엽인 자신을 무시하는, 배신 내지 배은망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분노한 공주는 남편과 무비를 보기만 하면 길길이 날뛰며 잡아 먹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으니 이혼도 못하고, 매양 서로에게 지옥이나 만들어 주는 최악의 부부생활을 해야 했던 충렬왕은 이에 넌더리를 내며 더욱 밖으로 돌았을 것이니,
조정인들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고, 나라꼴은 점점 더 개판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충렬왕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아내였겠으나,
그래도 공주는, 아무리 측근이라 해도 전횡을 용서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로 보아, 공주는 무턱대고 갑질이나 해대는 욕심 사나운 일반적인 속물은 아니었고, 엄격했었다는 평가 그대로 나름 공정한 성품을 지닌 왕비였던 듯하다.
이러한 성향의 여인이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남자를 만났다면, 가정을 반듯하게 꾸린 현모양처라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녀의 신분과 당시의 정세는 공주에게 이러한 소박한 행복이 아닌, 소란하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략결혼이라 해서 모두 불행하게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민왕처럼, 막상 당사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당시 고려의 대내외적 여건은 두 사람에게 그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록 겉은 화려하였으나, 질투와 투기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스트레스가 많았던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쿠빌라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처음에는 반대했던 이 결혼을 허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사랑하는 막내 딸이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살다가 결국 요절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비판적이었던 충선왕은 원에서 급거 귀국하여,
시해되었기에, 고귀한 어머니가 40도 못 채우고 사망하였다고 단정짓고,
어머니와 평소에 가장 사이가 나빴던 무비를 죽여버리고,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내 버렸는데,
충선왕에게 이들을, 간악한 요부의 치마 속에 숨어, 임금의 눈을 가리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백해무익한 간신배들로만 여겨졌겠지만,
마누라를 포함해서 사방이 감시자 내지 적으로 둘러쌓여 있던 충렬왕에게 이들은,
그나마 왕을 지지하고 보좌해 주는 마지막 남은 친왕파와 다름 없었다.
따라서 비록 아옹다옹했을 지언정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젊은 아내가 사망한데 이어,
사랑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족까지, 뒤를 이을 아들의 폭거로 잃어버린 충렬왕은,
결국 권력의지를 잃고 손을 들어 버렸다. 아마도 산다는 것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컸을 것이다.
쿠데타 아닌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이러한 고려 왕실의 꼬라지에 넌더리가 났던지,
즉위하자마자, 격하된 기존관제의 복구를 비롯한, 거의 반원정책에 가까운 개혁정책들을 야심차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충선왕의 힘이 커지는 것을 꺼려한 원조정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말았는데,
왕비가 조비를 무고한 편지를 명분으로 황제가 파견한 관리는 충선왕을 만나자,
다짜고짜 옥쇄를 빼앗고 연행하듯 원나라로 끌고 가면서,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충렬왕에게 옥쇄를 건넸다고 한다.
속국 고려의 왕, 참으로 가치 없는 자리였다.
다시 복위한 충렬왕 또한, 아들과 무슨 왕 잡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심정이 복잡하였을 것인데,
원나라 또한 치국은 고사하고 수신, 제가도 제대로 못하는 충렬왕을 불신하여, 극심한 간섭을 하였다고 한다.
이 꼴로는 개혁이고 왕권강화고는, 모두 물 건너가 버린 것이므로, 왕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회의가 들어야 정상이었을텐데,
충렬왕은, 되찾은 이 꼴꼴난 왕자리나마 지키기 위하여 아들과 끊임 없이 갈등하였고,
심지어는 아들과 며느리가 불화하자, 어른답게 다독이고 충고하기는 커녕,
아들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고까지 하였다.
참으로 찌질한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몽골 황제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뒈져버리자, 노구를 이끌고 황도까지 가서 아버지 원종처럼 다음 대 황제를 찍으며 생의 마지막을 불살랐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아들이 속한 진영이 아니라 반대파인 황후파 안서왕이었다.
아버지처럼 순수한 감이었는지 아니면 아들과 싸우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뭐가 되었든 결과는, 애쓴 보람도 없이 안서왕이 주살 되면서 황후파의 완패로 귀결되었고,
그 여파로 충렬왕의 측근들도 궤멸되었으며, 더불어 며느리 개가책동마저 자연스레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충렬왕은 초라한 모습으로 쓸쓸히 귀국하였고,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는데,
이 때가 1308년. 향년 73세로, 고려 국왕 34명 중 최장수였다.

충렬왕기는 기존 외왕내제 정책에 의한 국가 운영 시스템이 폐지되어 명실상부한 속국이 된 시기로서,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천자를 의미하는 호칭들이, 다루가치의 지적질에 의해 모두 바뀌었는데,
우선 폐하는 전하로,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천자의 명령을 전하는 선지는 왕지(王旨)로, 천자가 천하에 은혜를 베푸는 사는 유로,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라는 뜻의 주는 정으로 바뀌었다.
제사 제도 또한 바뀌어 성종이 설치한 7묘 9실제 태묘는 제후의 5묘제 태묘로 바뀌었고,  
묘호도 사용금지가 되었으며, 시호 또한 스스로 정하지 못하였다.
관제 역시 격하되어, 2성 6부제는 폐지되고 1부 4사제로 바뀌었으며,
오등작 제도 또한 유지하기 힘들어, 나중에는 결국 군호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서울을 의미하는 경(京)도 사용하지 못하여 수도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 개성현’으로 개칭되었고,
태조 때부터 이어져 온 팔관회도 개수되어 만세를 외치지 못하였으며 천세로 바뀌었다.
다만 의복은 그대로 이어져 곤룡포는 황제의 색깔인 황포를 유지했으며,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은 어찌어찌 살아남아 조선까지 이어졌다.

카다안의 침입 시나 말년에 한 짓을 보면,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이게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한심한 이미지이긴 하나,
즉위 초에는 나름 의욕적인 개혁 군주였다.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약속한 세조구제을 명분으로, 고려의 존속에 확실한 도장을 받았고,
1차 일본원정이 끝나자 1278년 다시 입조하여, 원나라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다루가치들을 내쫓았다.
또한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여,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보하였으며,
카다안이 침입한 1290년에는 동녕총관부가 요동으로 이전하는 틈을 이용하여,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자비령 이북의 땅을 돌려받았고,
1301년에는 탐라총관부도 돌려받았다.
그리고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을 준비하느라, 독박 썼던 전비도 모조리 보상받았다.
뛰어난 협상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예전 전민변정도감을 부할시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구제하려고 하였는데,
비록 권문세족들의 반대와 천출 측근들의 무능과 부패로 무위가 되긴 하였으나,
이후 고려 사회의 핵심 문제였던 양인 수의 감소에 주목했던 그 안목만은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편민 18사를 채택하여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려고도 하였다.

원조 오렌지족 답게 원의 대도에 자주 들락거리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앞장섰고,
안향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묘를 설치하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또한 일연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이승휴제왕운기가 간행되었으며, 유명한 고려가요 쌍화점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애잔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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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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