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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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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26대 충선왕, 경계인으로 살다

왕 장, 이지르부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의 맏아들이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첫 몽골 혼혈 고려국왕이다.

1275년 출생하였고,
3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원에 입조하여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7살에 다시 입조하여 쭉 몽골에서 생활하였는데,
19살 되는 1294년에 쿠빌라이가 죽었고,
22살에, 이미 3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계국대장공주와 정략 결혼하였다.
아버지처럼 원 황실의 부마가 된 것이다.
23살에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귀국하여,
아버지의 총비 무비를 척살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이 양위하자, 이듬해인 1298년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선포한, 급진적이었다는 포고령을 보면,
1.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포상한다.
2. 공신의 자손에게 공신전을 지급한다.
3. 내시의 등급을 상승시킨다.
4. 실력을 위주로 임명, 파면, 승진을 결정한다.
5. 신분에 상관 없이 인물을 등용한다.
6.무신 정권의 몰락과 함께 급격히 기운 무신들의 권세를 상승시킨다.
라고 되어 있는데,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대부분 당연한 소리라, 이게 뭔 급진인지 의아하기까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분 타파, 토지 제도 개선, 관리의 임면 제도 개선 등 당시의 사회 환경상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충선왕은 말만 한 게 아니라,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답게,
사림원을 설치하여 거의 반원적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러한 쾌거는, 백성들에게는 통쾌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권문세족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 이 죽여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놈들은 격렬히 반발하였다.
한편 대대로 귀족들의 나라였던 고려에서 권문세족들과 싸운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지를 알리 없는,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후궁 조비를 질투하여, 조비가 자신을 저주하였다고 원황실에 무고하는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였다.
이리되자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원성종 테무르는,
쿠릴타이에 참가할 수있는 고귀한 신분이면서 왕국까지 보유하고 있는 고종사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형님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대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반 정도의 나이인 조카딸의 판단을 받아들여, 즉위한지 8개월밖에 안 된 충선왕을 폐위하고 원나라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라면 폐위된 왕과 그 친위 세력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말살되었을 것이나,
충선왕의 경우는 국내의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타도 된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원황실의 부마였기에, 고려 왕위에 대한 계승권은 여전히 충선왕에게 있었으며,
고려 조정에 대한 영향력 또한 살아있었다.

원의 대도로 돌아온 충선왕은,
따로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자기가 실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처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항렬이 높은 황실의 종친이자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답게,
종친들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비상금을 털어가며 교류을 하였으며,
운이 좋은 것인지 정치적 감각이 뛰어 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고 있던 황제의 조카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의 스승이 되었다.
지체높은 집안의 홈스쿨링 가정교사가 된 것인데,
선생 노릇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제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름의 호구지책과 근거를 마련한 충선왕은 허무하게 날려 먹은 고려왕 자리에 복귀하기 위하여,
고려에 남은 자파의 귀족들을 충동질하여 환국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한편, 아직 존속하고 있는 정동행성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견제하였다.

한편, 얼떨결에 다시 옥좌에 앉은 충렬왕은,
이미 한번 양위를 하기도 한데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마누라가 사망한 뒤여서,
이래저래 면구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게다가 원의 조정에는, 치국은 고사하고 수신, 제가도 못하는 소인배로 낙인 찍혀,
수시로 파견되는 사신들과 일본 원정이 끝난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던 정동행성을 통한 원의 극심한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 꼬라지면, 치사해서라도 옥좌를 얼른 자식에게 돌려주고 여생을 즐겼으면 좋았으련만,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왕위에 대한 집착은 왜 그리 강하였는지,
아들과 며느리의 불화를 이용하여 이러한 상황을 단박에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켜 아들의 부마 신분을 박탈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직위해제 개념이 아닌, 완전한 폐위를 이끌어 내고자 한 것인데,
이는 아버지가 아들의 결혼을 파토나게 만드는 비열한 짓이기도 했으나,
왕위에 목을 맨 충렬왕은 이에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계국대장공주

한국공주라고도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쿠빌라이 칸,
할아버지는 황태자였으나 아버지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은 친킴이고,
아버지는 친킴 태자와 태자비 코코진의 장남이었으나 황위를 잇지 못한 카말라.
따라서 공주는 황제의 딸이 아니었으므로,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황태후 코코진이, 쿠빌라이의 막내딸이 왕비로 있는 고려를 주목하였고,
고려의 세자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이로써 공주는 황녀급 대우를 받은 셈이었고,
고귀한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족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 하는 충선왕 또한,
로열 패밀리 처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서로 별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주의 나이였다.

1296년, 5촌 아저씨 충선왕과 결혼했을 때, 공주의 나이는 12살,
시어머니 제국대장공주보다도 4살이나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것인데,
제국대장공주도 제대로 성숙한 나이에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국대장공주는 아예 성숙을 논할 나이도 아닌 그냥 어린 아이었다.
이때 이미 3명의 아내가 있었고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있던, 22살의 충선왕이 이 어린 신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아성애자는 아니었는지 별거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수도승처럼 금욕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다른 부인들과는 활발한 부부생활을 한 모양인데,
1297년, 모후의 급사를 계기로 귀국한 충선왕은, 왕위에 올라서도 부부생활의 패턴을 바꾸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계국대장공주는 조숙했던지, 충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조비를 질투하였다고 하는데,
13살 먹은, 어린 신부의 강짜에 충선왕은 기도 안 찼겠지만,
남편이 뭐라고 생각을 하든, 철들기에는 너무 어렸던 공주는 친정에 충선왕과 조씨를 모함하는 편지를 보내, 소위 조비무고사건을 일으켰고,
편지를 받아 본 원황실은 이 되바라진 어린 것의 억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충선왕과 조비를 원나라로 잡아가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다.
이로써 남편의 폐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공주는,
사춘기의 반항심인지 아니면 애가 원래 싸가지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아버지의 비열한 개가 책동에 적극 동조하는 등 사사건건 남편과 대립하였는데,
충선왕의 인맥이 빛을 발한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보수적인 결혼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매번 중서성 고관들의 반대에 부딛혀 개가하지 못하였다.

비열한 아버지와 무개념 아내라는 인생 최대의 난적들과 악전고투를 하던 충선왕에게,
천지신명이 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 테무르가 후계도 남기지 않고 뒈져버리는 사태가 발행하였다.
멀쩡한 후계자가 있어도 지지고 볶는게 다반사인 몽골 황실 풍토에서,
이러한 지랄 맞은 상황은 필연적으로 후계자 쟁탈전으로 이어졌고,
여러 번의 반전이 있었으나 결국 충선왕의 옛 제자 카이산이 뒤를 잇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충선왕은 결정적인 역할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반면 아버지 충렬왕은 노구를 이끌고 대도까지 와서 아들과 달리 황후파 안서왕에게 베팅하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늙은 고려왕에게 천하의 대세를 결정한 힘은 없었으므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제 관성대로 흘러, 황후파에게 패배를 안겼고 안서왕은 분사하였다.
졸지에 역적이 되어버린 충렬왕도 이 수레바퀴에 깔리는 신세를 면할 수는 없었기에, 그 똘마니들은 모두 충선왕에게 주살되었고,
계국대장공주와 눈이 맞았던 상당한 미남이었다는 서흥후 왕전도 제거되어, 충렬왕이 총력을 기울였던 며느리 개가 책동 또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절에 유폐되어 있던 충렬왕은 겨우 목숨을 구하긴 했으나, 빈손으로 쓸쓸히 귀국하여야 했고,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던 인생을 접었다.

1307년 카이산이 원 무종에 등극하면서 태사가 된 충선왕은,
이듬해 1308년에는 요령성 일대를 영지로 하는 초대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로 돌아와 다시 고려국왕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심양왕에서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
원래 2자 왕보다 1자 왕이 더 격이 높은데, 충선왕은 출신과 공적 때문에 실권까지 있었으므로, 이즈음의 충선왕은 징기스칸의 동생들의 가문인 동방 3 왕가의 수장들과 동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갖추고 다시 고려에 복귀한 고려심왕 충선왕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처럼 ,
1. 세금을 낮추어 걷는다.
2.귀족들의 횡포를 엄단한다.
3.실력있는 인재를 등용한다.
는 포고령을 발하고,
왕권의 강화, 농업과 잠업의 장려, 권문세족의 횡포 억제, 동성동본 결혼금지, 조세의 공평, 관리의 고른 등용 등을 추진하였으며,
각염법을 시행하여,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아, 재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요양의 세력가 홍중희가 대도에서 입성론을 제기하며 충선왕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였고,
고려 권문세족들의 저항 또한 여전하여 개혁이 지지부진하였는데,
결정적으로 숙창원비 사건까지 터져 버렸다.
숙창원비는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을 위로하기 위해 바친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숙창원비가 충렬왕의 무엇을 어떻게 위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뻤는지, 아버지가 죽은 뒤 귀국한 충선왕도 숙창원비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체로도 심각한 패륜인데,
문제는 충선왕이 이 요부에 홀려, 능력도 없는 그녀의 오빠를 고위직에 등용하고, 팔관회까지 중지하는 등 정사까지 개판을 쳐버렸다는데 있었다.
이는 개혁이다 뭐다해서 가뜩이나 짜증이 만발했던 고려의 귀족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데, 결국 조정 중신 우탁이 추악하다고 일갈을 하자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고려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학자를 자처했던 충선왕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충선왕은 아무리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제 스스로는 그 어떤 몽골인 보다 더 몽골스럽다고 우긴다 해도 엄연히 왕씨를 가진 고려인이었기에,
원의 조정에는 그의 출세를 고깝게 생각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홍중희처럼 제 것을 빼앗기고 이를 가는 정적들도 양산되는 상태였다.
따라서 부끄러움 보다는, 황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여 핑계김에 일단 중앙정계로 복귀했을 것이다.

대도로의 복귀가 무엇 때문이었건 간에, 소위 원격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고려에게는 이게 또 새로운 악몽이었다.
우선 왕의 원나라 체재비용이 많이 들었고,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사정상, 나랏일 또한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국내에서는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고, 원의 조정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황제의 측근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고려 심왕이 부담스러워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대도의 정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충선왕은 이를 번번히 거절하였고,
1310년 원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장남인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고 하자, 세자를 죽여버리면서까지 왕위에 집착하였다.
그런데 1311 원무종이 죽고, 친밀도가 높았던 옛 수제자 아유르바르와다가 원인종으로 등극을 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1313년, 제위 5년 만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하였다.
고려로 돌아가는게 징그럽게 싫었나 보다.
그리고 1316년에는 조카 왕고에게 심왕 자리도 양위하였다.

한편, 계국대장공주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무력을 포함한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원나라에 영지가 있었고, 고려 왕비로서의 경제적 수입도 있었기에, 경제적 기반도 탄탄했다고 하는데,
인생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바람에, 남편에게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이후에도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남편과 대결을 선택하였다.
이로 인해 멀리 떠나간 남편의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공주 또한 되돌리려는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
비록 형식적인 결혼관계는 유지하였으나, 이미 쫑나버린 부부였기에 자식이 있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겉 보기에는 화려, 장엄하였으나, 애틋한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315년 향년 30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원나라에서 사망하였다.

충선왕은 왕위를 모두 내려 논 뒤에도 대도에 머물었는데, 아버지처럼 음주가무로 인생을 낭비한게 아니라,
만권당을 설립하여 고려와 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으며,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해 원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는데,
이때 이제현도 초빙되었다고 한다.
반면,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완전한 몽골인도 아니면서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권력상층부에 진입한 충선왕에게 적대적이었는데,
1320년 원나라의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사망하자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를 가야 했다.
다행히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로 3년만에 귀양이 풀린 충선왕은  대도에서 소일하다
1325년 사망했다. 향년  51세.

*입성론
일종의 자치령이었던 고려를 원의 지방제도에 편입시켜 황제의 직접통치를 받게 해달라는 청원으로 고려왕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부원배들이 주로 주장하였다.
이 입성책동은 충선왕 복위 이후부터 약 3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1309년(충선왕 복위 1) 경에 요양행성 우승 홍중희에 의해 제기된 것이 첫번째였다.
홍중희는 희대의 매국노 홍복원의 손자로서 요양 지방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심양왕에 봉해지고 요양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충선왕을 탄핵하는 한편,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충선왕은 고려왕에 복위한 직후부터 단행했던 개혁의 일부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충선왕에 대한 원황실의 신뢰가 확고하였기에
홍중희의 볼기를 때리고 조주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청신·오잠 등에 의한 제2차 입성책동이 있었는데,
이는 충선왕이 토번으로 유배되고, 충숙왕이 국왕인을 빼앗기고 원나라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자, 고려에서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유청신과 오잠 이 잡놈들이 심왕 고의 편을 들기 위해 제기하였고,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으로 정할 정도로 상당히 진전되었으나,
당시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제현 등이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여 실행되지는 않았다.
제3차 입성책동은 1330년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장백상은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을 지낸 몽골놈도 아닌 중국놈이었는데,
충숙왕이 퇴위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뜬금없이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이는 충혜왕이 직접 요청하여 중지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이운·조익청·기철 등이 충혜왕이 탐음부도하다는 명분으로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4차례의 입성책동은 모두 좌절되었으나, 입성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어 고려의 처지는 더욱 궁색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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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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