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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문화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연꽃이 활짝 핀 봉은사의 풍경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연꽃이 활짝 핀 봉은사의 풍경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봉은사는  1,000년 이상 오랜 왕조의 역사를 유지한 나라인 신라 시대 부터 고려, 조선, 근대를 거쳐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한 서울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사찰 중에 하나이다.  봉은사는 과거 강남지역의 유일한 랜드마크였다고 한다.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21세기 글로벌타운이 된 강남의 도심 속에서도 봉은사는 천년의 과거를 기억하는 고찰의 위상과 함께 전통사찰의 문화공간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봉은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날 기자가 봉은사를 방문하였을 때는 연꽃축제가 한참이라 많은 인파가 봉은사로 몰려들었다. (사진=ⓒ 김동주)

봉은사에서 볼 수 있는 활짝 핀 연꽃

신라시대 처음 세워진 봉은사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며 보현행을 닦았던 신라 원성왕대의 고승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38 <잡지(雜誌)> 제7에는 봉은사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실려 있다. 이른바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곱 사찰은 사천왕사ㆍ봉선사ㆍ감은사ㆍ봉덕사ㆍ영모사ㆍ영흥사 그리고 봉은사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하는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였다. 또한 일반 행정관청과는 다른 특수 관청으로서 그 관원 조직도 일반적인 관직 이름과 다른 호칭의 관원들이 왕실 사원의 행정과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당시에 성전이 설치될 정도의 사찰은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다. 실제 봉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라 진지왕의 추복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이미 혜공왕대로부터 사찰 조성을 시작하여 선덕왕을 거쳐 원성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 등이 각종 자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고승의 사리를 보관하고는 탑 (사진=ⓒ김동주)
고승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 (사진=ⓒ김동주)

불교국가 고려에서의 봉은사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는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명찰은 세 곳이 있다. 각각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불교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들이다. 먼저 신라 시대의 봉은사는 앞서 말했듯이 혜공왕대에 시작하여 원성왕대에 완성한 성전사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봉은사는 수도 개성에 위치했던 사찰로 태조 이래 역대 왕실에서 매우 중시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선종 계통 사찰로 유명하였고, 대대로 국사ㆍ 왕사의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시대의 봉은사는 바로 문정왕후의 발원과 보우대사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서울의 봉은사이다.

고려의 흔적은 사료적으로 찾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1344년(충혜왕 5)에 조성된 은입사향로에 관련한 내용은 봉은사의 고려의 숨결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32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향로는 최근까지 봉은사에 있다가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봉은사 정문을 지나 뒷편의 풍경 사진= 김동주 기자
해수관음상 사진=ⓒ김동주
미륵보살 사진=김동주

숭유억불시대의 조선, 생사의 갈림길에 선 불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자리를 꿰찼을때 불교 사원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인 숭유억불에 따라 1406년(태종6)에는 국가 인저 사찰이 242개사로 줄었고, 1424년(세종6)에는 다시 전국의 사찰 중에는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각 18개 사찰씩 36사만을 선정하여 3천 7백여 명의 승려만 인정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조선 양종제도 시행 시에 서울의 중심 사찰은 선종사원 흥천사와 교종사원 흥덕사였다. 이밖에 승가사와 장의사가 36사에 들어 인정받았지만 봉은사나 그 전신인 견정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연산군 대에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고 선교 양종 제대도 무너졌다.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은 명종대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활동에서부터엿다.  이미 중종 때부터 봉은사는 중심 사찰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도성에서 선교 양종 도회소 역할을 하던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었으니 도성 인근에서 규모와 위상이 큰 사찰로는 봉은사가 대신 부상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종 때인 1539년(중종 34)에 대대적으로 사찰을 모두 철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그 중심에 봉은사가 있으니, 이들을 그냥 두고서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으로는 승려를 근절시킬 수 없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전국토가 유린된 임진왜란을 거치고

전국토가 유린되었던 1592년의 임란을 거치며 봉은사도 피해를 입었으나 절의 대체적인 모습은 유지되었다. 1612년(광해 4)에 광해군은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봉은사 주지로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위를 주었다. 벽암대사는 화엄사, 송광사를 비롯한 전국의 유수 사찰을 중창하고 승군을 이끌었던 당시 중심인물이었으므로 봉은사도 이때 피해 입은 당우의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시기에 벽암대사는 신익성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많이 사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봉은사가 도성에 가장 인접한 제일 대찰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고, 그런 만큼 봉은사의 형세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봉은사의 더 큰 피해는 병자호란 때 일어났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전소되어 몇 칸의 당우만을 남기고 퇴락한 것이다. 오랜 전란으로 전국토가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피폐된 일반민들의 생업 경제가 되살아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은 더욱 깊어진 듯 전란이 끝나자마자 사원의 복구는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봉은사도 마찬가지였다.

봉은사에서는 이에 경림(敬林)을 중심으로 중창에 나서, 먼저 법당을 세우고 요사를 차례로 중건하여 이내 옛 형세를 다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능침 사찰로서의 위상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도성에서 가깝고 한강변에 자리 잡아 풍광도 뛰어난 봉은사에는 여러 문사들이 찾아 많은 시를 남길 만큼 다시 성황을 보였다.

봉은사가 조선 말기 교학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이 화엄경 판각 불사는 영허선영(暎虛善影, 1792-1880)과 혼허지조(混虛智照) 등을 증명으로 삼고 영기대사를 도화주로 주선자들을 비롯한 수십 명이 화주가 되어 왕과 왕비 및 3 대비 그리고 부원군 홍재능, 훈련대장 김병익, 경기감사 이원명, 경상감사 신석우를 비롯한 수많은 신남신녀와 비구 비구니들의 정성을 모아 이룩된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봉은사에서 수행하던 당대 명필 김정희가 판전 현판을 써 걸었다. 이 화엄경 간행 불사에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이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남호대사는 일찍이 삼각산 내원암에서 아미타경을 간행한 이래 흥국사에서는 연종보감 등을 간행하고, 봉은사에 이어서 철원 석대암에서는 지장경 등을 간행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경하여 오대산 보궁과 오세암에 봉안하는 등 경전 간행과 보급에 진력한 인물이었다.

북학을 마무리 지은 대학자이자 첫손꼽는 명필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만년에 불문에 귀의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보내면서 매일 연비를 하는 자화참회(刺火懺悔) 등을 실천 수행하였다. 이는 마침 1856년에 추사를 만나기 위해 봉은사를 찾은 문사들을 따라갔던 상유현(尙有鉉)이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서 자신이 직접 본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알려졌다.

시민들의 소원이 담긴 연등 사진= 김동주 기자

일제의 침략 기도를 뿌리쳐야 하는 과제, 근현대의 봉은사

전통 불교의 명맥을 되살려 새로운 지향을 시도하면서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침략 기도를 뿌리쳐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지방 사원의 포교당이 서울에 늘어나면서 도심 포교도 새롭게 모습을 보였다.

불사를 맡았던 화사들은 경선응석(慶船應釋)을 비롯하여 영명천기(影明天機), 보운긍엽(寶雲亘葉), 한봉창엽(漢峰曄), 혜산축연(蕙山竺衍), 예운상규(禮云尙奎) 등 명가들이었는데, 단월로 상궁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봉은사는 30 본산에서 첫 번째로 꼽힌 사찰이 되어 이름을 선종갑찰대본산봉은사(禪宗甲刹大本山奉恩寺)라고 내세우고 서산대사의 법손이 주지하도록 하는 봉은사본말사법을 인가받아 시행하였다
제도가 바뀐 이후 1912년에 첫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학밀(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사원의 토지를 확보하고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였다. 본래 오대산에서 강학에 열중하던 청호화상은 일제 불교의 침투에 대응하여 전통 불교를 수호하려는 원종 종무원에 감사부장으로 참여하며 각황사에서 포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특히 을축년(1925) 7월 한강을 덮친 대홍수 때 청호화상의 활동은 빛났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홍수로 한강이 넘쳐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청호화상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하나씩 건져냈다. 이렇게 구한 인명이 무려 708인이었다. 그리고는 사중의 재물을 모두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조실로는 뛰어난 선사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이었다. 출세간의 경지를 걸었던 조실의 상황에 적절하게 구사된 법력과 주지의 세간에 다가간 손길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쾌거였다.

봉은사 영산전 사진= 김동주 기자

서울 갑찰의 본산이었던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의 마포 포교당을 시작으로 1924년에 안변, 1926년에 인천, 1932년에 서울 관동, 1933년에 서울 현저동, 1934년에 서울 옥천동 등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도심에 가장 인접한 봉은사가 나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었다. 본사와 포교당 간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포교의 마당에 봉은사의 역량이 미친 것이다.

광복 후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란이 끝나고 부분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정화를 겪으면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고 봉은사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봉은사가 위치한 강남 삼성동 지역은 현대적인 번화가 건물들이 들어져 있어서 과거와 현재가 대조되는 느낌을 받는다. 쌩뚱 맞는 모습일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에서 정감가고 휴식을 취하기 편안한 공간을 찾는다면 봉은사를 추천하고 싶다.

다른 사찰들과 달리 봉은사는 관리가 잘 된 편이라 낡은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곳곳 마다 커다란 불상과 미륵대불은 오는 이의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한편 봉은사는 국가지정문화재 2종과 다양한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글, 사진, 김동주 기자

 

2018-08-25 기사 수정되었음

김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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