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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3:24 오전
오피니언사설/칼럼고구려 : 20대 장수왕, 5세기의 신화

고구려 : 20대 장수왕, 5세기의 신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 오래 살며  5세기를 지배하였다.

이 분의 함자는 거련,
고구려를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업그레이드한 위대한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39세라는 아깝기 짝이 없는 나이에 붕어하자,
412년 아버지처럼 낭랑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대국으로 거듭난 고구려는 겉보기에는 화려했으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가뜩이나 드센 누대의 귀족 세력들이나 아버지 대에 양산된 공신들은, 대국 형성에 기여한 자신들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복속한 지역의 백성들이나 세력들은 힘에 굴복한 것이었기에, 틈만 보이면 언제든 반란 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이 중원의 강자가 된 북위도,
고구려와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북연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실력을 투사하고 있었으므로,
이 또한 두통거리였다.
갓 등극한 홍안의 애송이에게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인 공개토대왕의 카리스마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버지처럼 특출한 재능도 없이, 수두룩한 난제에 둘러싸인 어린 왕이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이라고는,
광개토대왕의 적통이라는 것뿐이므로, 일단 광개토왕릉비를 세워 위대한 아버지의 업적을 기렸고,
사신을 보내고, 받고, 사냥하는 일상적인 왕 노릇만 하며 10여 년을 보내었다.
그리고 평양으로 천도 하였다.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다루기 힘든 국내성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을 것인데,
평양이라고 마냥 만만할 리는 없었겠으나,
기득권들의 본산 국내성 보다는 고분고분했을 것이니,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하여,
기개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을 야심찬 청년왕에게 평양천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니들 보기 싫어 옮길란다` 고 할 수는 없으므로 대 내,외적 명분은 방어였을 것이다 .
역대 중국세력과의 전쟁이 증명하듯이, 가상의 주적 북위와 전쟁을 하기에, 
국내성은 적과 거리도 가깝고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기후가 춥고 토질이 척박한데다 그나마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얼마 안 되었다.
반면에 평양은 우선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많은 데다,
옛 중국 군현세력의 본거지답게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상대적으로 풍부하였으며 기후와 토질이 농사에 적합하였다.
나중에는 배후의 신라나 백제가 위협이 되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는 둘 다 식물 상태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평양 천도를 완료했을 때가 재위 16년,
다른 왕들이라면 슬슬 인생의 마무리를 시작해야하지만 장수왕은 이제 시작이었다.

재위 24년, 북위가 준동하여 위기에 빠진, 북연의  3대 황제 풍홍이 고구려에 구원 요청을 하였다.
사실 북연과 고구려의 관계는 좀 모호한데,
북연은 설립 시 고구려의 분가 개념으로 고구려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강하였으나 황제국이었고,
반면에 우위에 있는 고구려는 조공국이었다.
뭔가 이상하지만 이런 식으로 관계가 설정된 이유는,
북연의 설립 시 풍발이 쿠데타를 일으켜, 
후연의 황제를 죽이고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을 추대하였는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모용운은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면서,
모용씨를 버리고 원래의 고씨로 복성하였다.
이는 고구려를 종가로 인정하는 갈데 없는 제후의 행위였으나,
자기 힘으로 정권을 잡은게 아닌 고운이,
정변 공신인 풍발을 비롯한 북연의 제세력들을 무시하고, 공식적으로 고구려의 제후를 자처하지는
못한 듯하다.
반면에 고구려는 고운을 지원하기 위해 황제로 인정한 듯하고.
종가가 제후가 되는 이상한 관계이긴 했으나,
그래도 서로 상부상조하며 존중하는 나름 창조적인 관계였는데,
고운이 암살당하고 풍발이 2대 황제가 되면서 상황이 꼬이게 되었다.
풍발은 제법 황제 노릇을 잘했고, 고운과는 달리 고구려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제대로 된 황제 대접을 받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좀 기분은 나빠도 자존심을 세우느라,
국력을 낭비하고 요동을 불안하게 하기 보다는 기왕의 형식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고.

그런데 3대 황제, 풍홍이 즉위한 후 상황이 또 한 번 반전 되었다.
북연은 북위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몰리게 되자. 조공국,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제후국으로서 충성을 다해주기를 기대했겠지만, 그건 님 생각이었고,
고구려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풍홍만 구원하여 탈출시켰다.
이는 풍홍의 정치적 비중을 생각해서 한 일이지,
상전의 위기를 나의 위기로 여겨 대리전을 치르는 개념이 아니었으나 풍홍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
구원을 받은 풍홍은 위로하는 장수왕을 꾸짖고,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등 개념을 상실한 짓거리를 하여,
장수왕을 열받게 하였고 결국 천덕꾸러기가 되었는데,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풍홍은 송나라로 망명을 시도하였고,
이에 인내가 바닥난 장수왕은 풍홍을 두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바보짓을 하다가 명을 단축한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당시 장수왕의 위상은 풍홍 따위가 꾸짖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북위로부터 풍홍을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병 인도 요청도 거부하였고,
풍홍이 송에 망명 요청을 하여,
송의 사신이 병사와 더불어 도착하였는데도, 인도를 거부하고 풍홍을 죽여 버렸으며,
그 와중에 고구려 장군이 전사하자 송의 장군을 체포해 버렸다.
이렇게 중국의 남북조를 모두 무시하였으나 둘 다 감히 항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는 오히려 혼인 동맹을 요청하였고, 
송은 체포되어 송환된 장수를 투옥하고 고구려의 눈치를 보았다.
장수왕의 고구려는 동북아의 조정자 내지는 균형자의 위치였던 셈이다.
아무튼 이럭저럭 중국의 남,북조, 유연, 그리고 고구려의 4강체제가 완성되어 한숨 돌리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왕이라면 이쯤에서 저승구경을 해도 재위기간이 충분하였을 것이나,
이 분의 메인 게임은 아직이었다.

사반세기에 걸쳐, 확장된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던 장수왕에게는 아직 50여 년의 잔여 수명과, 남하 정책이라는 그의 인생을 특징짓는 과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작은 신라였다.
광개토대왕에 의해 속국으로 전락한 신라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재위 29년경 신라가 이들을 몰살시키고 느닷없이 독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독립한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이었으면 당장에 요절을 내었겠지만,
그의 아들은 사건이 발생하고 1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신라의 변경을 두들기기 시작하였고,
재위  57년에서야 신라의 실직주성을 점령하였다.
아버지에 비해 참으로 느린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신라가 호랑이 콧털을 뽑는 동안 백제도 가만히만 있지는 않아서, 
변경을 침입하는 등 반 고구려 정책을 노골화 하였다.
그리고 개로왕 국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명문의 국서를 보내 고구려 침공을 부탁한 사건인데,
고구려의 눈치를 보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북위는,
침공은 커녕 고구려에게 백제의 청원을 알려주었다.
이에 열받은 장수왕은 백제와 전면전을 결심하였으나, 
시간이 많은 그답게 간첩 도림을 파견하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고,
재위 63년 드디어 백제를 침공하였다.
행동은 느렸으나 광개토대왕의 아들답게 한성 함락시키고, 개로왕의 목을 베었으며
대전 근방까지 진출하여 성을 쌓았다.
백제는 아신왕대에 이어 또 한 번 망한 셈인데,
이렇게 자주 망했으면서도 계속 재기한 그 저력은 높이 평가해줄 만하다.
곡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를 박살 낸 후 이번에는 북쪽으로 눈을 돌려, 
유연과 대흥안령 지역의 말의 산지, 지우두의 분할을 시도하였다 .
분할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몽골지역에서 고구려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끼어 있던 거란은 확실히 박살 낸 것으로 보인다.
북쪽의 일이 일단락 된 후 재위 77년에 신라를 공격하였다.
초전에는 파죽지세로 신라 북변의 7개성을 함락 시키고 서라벌로 진격하였으나,
그동안 재기한 백제, 가야 그리고 신라 연합군의 저항으로 신라의 재복속에는 실패하였다.
백제를 박살낸 후 그 여세를 몰아 신라까지 바로 공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영토를 크게 넓혔고 중원 땅에 고구려비를 세웠다. 이때의 연세가 97세, 
그로부터 한 1년 남짓 더 살다가 길고 긴 인생과 재위를 마쳤다.
향년 98세, 무려 79년 2개월간의 재위였다. 아마도 세계 최장 재위 기록일 것이다. 연호는 건흥.

광개토대왕에 비해 전공이 화려하지 않고 기간이 길어, 광개토대왕만큼의 열광을 끌어내진 못하지만,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임금이었다.
공격보다는 수성에 능했고, 무엇보다 명이 긴 덕분에 오랫동안 정국이 안정되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길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장수왕이 신라와 백제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 삼국통일을 완수했더라면,
이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고,
중국놈들의 동북공정에 열 받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완전 통일은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통일을 완수했다 해도 바로 재기하는 것을 막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신화처럼 5세기를 지배했던 위대한 장수왕.
좁아터진 한반도에 붙박혀 우리끼리 아옹다옹하는 못난 후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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