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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월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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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시작, 신비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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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발해는 멀어서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백제는 가까우면서도 알듯 말듯 실체가 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을 주는 고대 국가이다.

백제의 건국 설화는 여럿인데,
어떤 설이든 추모(주몽)의 재취인 소서노가 자기 부족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반도 중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동일하다.
소서노는, 추모가 전실 자식인 유리에게 다음 대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에 열 받아서,
고구려의 초대 왕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팽개치고, 
산 설고 물 설은 땅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여염으로 치면, 부유한 과부가 가난뱅이 떠돌이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가,
느닷없이 전실 자식이 나타나서 재산을 가로채려고 하니까,
열 받아 이혼하고, 혼인 때 가져온 재산 챙겨서 딴 살림 차린 꼴인데,
액면 그대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일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은 법원까지 가서, 변호사 사서 싸우는 아주 복잡하고 치사한 일인데,
하물며 왕가에서라면, 칼부림이 나도 몇 번은 났을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 국력의 척도는 백성과 전사의 숫자인데,
국가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의 이탈을 추모 혹은 유리가 그렇게 쉽게 묵인 했을 리도 없고.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보면,
동부여에서 권력 투쟁에 밀려 탈출한 주몽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졸본에서 토착세력과 연합을 형성하였고, 그 연합의 상징이 추모와 소서노의 결혼이었다.
추모는 소서노와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도 찾고, 애도 낳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유리가 아들이라면서 찾아온다, 부러진 칼을 들고서.
추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과 아귀를 맞춰보고, ‘아이고 내 아들’하면서 나라를 물려줬다…고 하는데,
동화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이게 실제로 가당키나 할까?

왕 자리는 왕이 물려주고 싶다고 물려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왕권이 강력했던 견훤, 이성계 등도 이 짓하다가 다른 아들에게 박살났는데, 중국에도 많고,
처가에 빌붙어 왕 노릇하던 추모가 감히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고,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실권을 쥐고 있었을 소서노가, 비렁뱅이 모습을 하고 찾아온 전실 자식의 목을 못 비틀어서, 곱게 물러났을 리도 없다.
백번 양보해서 소서노가 현모양처의 화신이라 그렇게 하고자 했더라도 부족의 장로들이 결사 반대했을 것이다. 추모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부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리 쿠데타 설에 의하면,
유리는 추모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동부여에서 탈출한 또 다른 이탈 세력의 수장이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정치 시스템이 어땠길래 이탈세력이 이렇게 많이 생겨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리의 세력도 졸본으로 왔는데, 선 이주 세력의 수장인 추모는 이미 졸본의 기존 세력에 투항한 상태였다.
그래서 같이 탈출했던 동지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여기에 유리의 세력이 가세하게 되자,
두 세력은 힘을 합쳤고 마침내 기존 토착세력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유리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추모와 토착 졸본세력을 압박하였고,
모종의 거래를 통해 서로 분리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이때 추모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 되었고, 유리의 아버지가 되었다.
따라서 추모는 고구려에서 이탈한 소서노 세력의 수장일 뿐이고, 순수 고구려의 진정한 시조는 추모가 아니라 유리이다. 이를 유리 쿠데타 설 또는 해씨 고구려설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하기는 하기는 하다. 백제가 동명성왕을 받드는 것도 이해가 되고.
그러나 기록이 전무하므로 진위를 알 수는 없다.

어찌 되었건 소서노는 무리를 이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남쪽이라고 해서 팔 벌려 맞이하는 땅은 아니었고,
여기도 토착 세력들이 서로 치고 받으며, 소신껏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마한이라는 힘센 놈도 있었고.
소서노는 남의 동네에 왔으니 이 동네 두목인 마한 왕에게 인사를 하였는데,
마한 왕은 기왕에 칼든 놈들이 왔고,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말갈의 땅에서 살겠다고 하므로,
울타리 노릇이나 하라고 허락한 듯하다.

마한 왕에게 정착을 허락을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에는 정착할 지역에 대한 이견으로 분란이 일어나,
형인 비류는 현재의 인천인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고, 동생인 온조는 하남시 부근인 위례에 자리를 잡았는데,
두 세력은 갈등하였고, 무력을 동원한 주도권 다툼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비류가 병들어 죽는 바람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인천에 자리잡았던 세력은 다시 온조의 세력과 합쳤고, 이들의 연합 정권이 백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로 똘똘 뭉쳐 싸워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든, 본거지에서 쫓겨난 세력이,
단순히 서식지의 호불호만으로,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는 것이 말이 될까?
기록이 없으므로 마음껏 상상을 해보면,
소서노의 세력은 원래 교역을 주로 하던 상인 세력이었는데,
이 상인 집단이 유리세력과 마찰을 일으켜 일족이 단체로 남하하게 되었고,
이 때 유리와 대척점에 있던 상인이 아닌 사람들도 동행을 하였다.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항구가 유리하므로 바닷가에 자리 잡기를 원하였고,
상인이 아닌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원하였는데,
이 상인 세력의 대표가 비류였고 나머지 사람들의 대표는 온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소서노는 온조의 손을 들어줬는데,
상인 세력은 고집대로 비류와 함께 미추홀까지 갔고, 나머지는 주위 세력이 만만한 위례에 머물렀다.
그런데 미추홀까지 간 집단은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렸고 비류는 좌절 끝에 죽었다.
반면에 온조는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였고 세력이 커져서 비류의 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가 아닐까?

이 정도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고, 기록도 부실하고 모순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기들이므로,
그저 ‘온조가 말갈의 땅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십제라 한 것이 백제의 시작‘이었다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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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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