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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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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2대 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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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 다루왕

온조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이어진 루자 돌림 왕들의 시작으로, 비류계 왕통의 시조로도 본다.
그런데 온조의 아들이면 온조계지 왜 비류계라는 말이 나올까?

기록이 부실하니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면,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아들이었다고 하고,
소서노는 졸본 부족장 연타발의 딸이었으므로 둘은 정략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초원의 유목민들의 관습대로, 우태도 징기스칸처럼 데릴사위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병들어 죽었는지 맞아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우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소서노는 아이가 있었으나 남편이 죽었으므로 시집으로 들어가질 않고 그냥 친정에 남았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부족 국가라 해도 명색이 왕자인데,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데릴사위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 때 온조는 없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애 하나 딸린 소서노는 추모(주몽)를 만나, 역시 정략결혼으로 다시 시집을 갔고,
온조를 낳았으므로, 온조와 비류는 동복이부 형제가 되었는데,
징기스칸의 예에서 보듯이 유목민들 사이에 이런 상황은 흔하므로, 특별히 흠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럭저럭 잘살고 있던 소서노 일가는 유리라는 복병을 만나 시련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 따듯한 남쪽나라로 탈출하게 되었는데, 이 탈출 집단의 구성은 어땠을까?

유리의 쿠데타 설을 믿는다면 유리에 반발하는 세력은 다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들이 주축이었을 것이고, 동부여에서부터 추모를 따라왔던 세력 중의 일부와, 그외 유리와 상성이 맞지 않는 세력들도 탈출에 동참했을 것이다.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파벌들은 입장에 따라 농경파와 교역파로 나뉘었는데,
교역파는 항구를 선호하고, 농경파는 내륙을 선호하는 등, 정착할 지역을 고르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대립하였을 것이고, 급기야는 갈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갈라진 두 집단은 무력충돌도 불사하였고, 처음에는 비류쪽이 우세하여 온조가 고전을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온조계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는데,
비류계에서는 온조계의 우세를 인정하고 다시 합치는데는 동의하였으나 항복이 아닌 일종의 동맹이므로,
다음 대 왕위를 요구하였고, 말갈에 시달리느라 진이 빠져버린 온조왕은 아버지가 다른 형의 아들 즉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이며 수용하였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진실이야 어디에 있건, 다루왕은 선왕의 뒤를 이어 49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
매일 전쟁으로 날이 지고 새는 건국 초기에, 가장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왕들이 이렇게 장수하였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온조왕의 46년 재위 기간처럼, 한 사람만의 재위 기간이 아닌 세력의 집권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누락된 왕이 있거나.

진실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다루왕은 온조왕처럼 말갈과 열심히 싸우며 영토를 확장하여, 청주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석탈해 이사금과도 여러 번 싸웠다 한다.
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상황이나 역량이, 서로 접경하여 기병을 수천씩 동원하며 교전할 정도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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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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