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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요일) 12:33 오전
오피니언사설/칼럼백제 : 12대 근초고왕, 정복군주의 위엄

백제 : 12대 근초고왕, 정복군주의 위엄

13 대 근초고왕

계왕을 살해하고 고이왕통을 멸절시켜,
귀족 세력들간의 이합집산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는 백제에 전제왕권을 확립한 철혈의 군주로서,
백제의 최전성기를 열었고, 대륙백제의 환타지까지 만들어낸 명군이다.

약 30년간 재위하였는데 즉위 19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기록 부실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다른 나라의 사서에도 기록될 만한 큰 일이 없었거나, 뭔가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재위 전반 20년 간 뭔 짓을 했건, 근초고왕은 재위 후반 10년 동안 엄청난 일들을 해낸다.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죽인 일이 가장 유명하나,
목지국을 정벌하여, 전라북도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야의 탁순국 및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누르고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 일,
그리고 그 이후 침미다례국을 정벌하여 전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업적이다.
또한 일본에 칠지도를 하사하고 아직기를 보내어 일본 태자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적 위상도 제고 하였는데,
중국 측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백제의 첫 번째 왕이라고 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년 가까이 은인자중하다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동서남북을 종횡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때려잡고 한반도의 패권까지 움켜쥘 수 있었을까?
당시의 국제 상황을 보면, 근초고왕 즉위년인 346년에,
부여가 전연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실질적으로 패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록 그 이후에도 부여의 명맥은 이어지나,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연명하는 비참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발해의 멸망에서 보듯이 고대국가의 패망은 잔존 무력집단을 남기고,
그 무력집단의 일부는 남아서 부흥운동을 전개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부여의 경우도 비슷했을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는 항상 사이가 나빴고 대무신왕 이후에는 거의 원수나 다름없었으므로,
부여의 망명 무력 집단은 고구려보다는 백제에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소서노의 탈출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부여의 무력집단이 백제로 왔다면,
그리고  발해 유민이 왕건에게 협조했던 것처럼 이들이 근초고왕에게 협력을 했다면,
백제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와 느닷없이 고구려와 사생결단을 낸 이유가 설명되고,
백제의 요서경략설도 근거가 생긴다.
근초고왕의 무기록 20년은 부여의 망명 무력집단과 근초고왕의 합작 내지 합병을 위한 기간이었고,
근초고왕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이었던 진씨 가문이 부여와 연결고리라면,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으나 기록이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부여 망명 무력집단과의 합작설에 따라 스토리 구성을 해보면,
귀족 연맹체 성격이었던 부여는 모용황에게 무너진 후 지배층이 분열 되었는데,
고구려에 대해 적대감이 강했던 세력들은 근초고왕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들을 영입한 근초고왕은 고이계를 제압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후, 
그동안 상전 노릇을 하던 마한의 맹주 목지국을 정벌하여 전라북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가야에까지 세력을 뻗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식의 동맹이었는지는 모르나, 가야를 통해 왜의 야마토 정권과도 손을 잡았는데,
철기조차 없었던 당시 야마토 정권은,
백제 또는 부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백제와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증강된 무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하여, 신라, 가야, 왜를 묶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으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또 다른 해상세력인 전남지역의 침미다례국은 연합군으로 정벌,
학살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침미다례국은 당시 ‘남만’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이었던 듯하다.한편 백제의 팽창은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남하하던 고구려에 위협이 되었고,
이미 전연의 모용황에게 신나게 터져 체면을 잔뜩 구긴 고국원왕은 체면도 좀 살리고 화풀이도 할겸, 백제를 침입하였으나,
백제는 오히려 역공을 가하였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로서 백제의 영토는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영토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요서경략설까지 더하면 더욱 웅대해지지만, 당시 항해기술이나 인구 그리고 세력분포로 보아,
설사 요서 백제가 존재했다하더라도 직접 통치는 무리였을 것이다.
근초고왕과 합작했던 요서의 잔존 부여세력을 지원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백제, 왜 연합군의 결성이, 일본의 가야정복설과 한반도 진출이라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되기도 하나 당시의 일본 본토의 상황과는 잘 맞지않는다.
부여 이주설을 한 번 더 써먹는다면,
백제에 협력했던 부여세력이 백제를 도와 서쪽을 평정하고 가야를 압박했으며,
신라를 제압한 후 가야의 도움으로 왜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이들은 왜로 건너가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백제,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나중에 일본서기를 기록할 때, 이 이주세력을 왜로 표기함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이,
임나일본부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일본에 철기가 보급되고 기마병이 나타나는 시기가 이 시기라 하니 아주 허황되지만은 않을 듯하다.
근초고왕이 칠지도와 칠자경을 왜에 선물한 것도 이 이주 세력에 대한 고마움이나 친밀함의 표현이라면 이해가 간다.

과거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사서마다 모순되는 내용이 많아 실체적 진실을 알기 어려운 것이 아쉽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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