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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11:27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27 대 선덕여왕, 초유의 여인 군주

신라 : 27 대 선덕여왕, 초유의 여인 군주

27 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 진평왕의 장녀 또는 차녀로서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신라 최고의 영웅들을 휘하에 두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여걸…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인은 632년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신라가 아무리 후진 사회였다 해도 그래도 명색이 국가인데,
성골이라는 사이비 종교 이론이 먹힐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보수적인게 귀족들인데,
이 보수 꼴통들이 여왕의 탄생을 박수치며 반겼을 리도 만무하므로,
나름대로 추정을 해보면, 
진평왕 말년에 있었던 칠숙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평왕의 헛소리에 반대하던 귀족들이 일망타진 되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귀족들도,
반란을 진압하여 기세등등했던 김 용춘, 춘추 부자와 김유신 같은 공주 측근들의 서슬에 눌려,
별 수 없이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이유가 뭐든,
과도기적 혼란을 상징하듯,
여왕은 즉위 후 바로 친정하지 못하고 을제, 김용춘 등에게 대리 청정하게 하였는데,
김용춘은 진지왕의 맏아들이므로 여왕의 오촌 당숙이 되고, 천명공주의 남편이므로 제부 또는 형부도 되는데,
나중엔 여왕의 3남편들 중 하나라는 신분도 가지게 된다.
성골이든 지랄이든 개판인 족보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스스로 제사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친정을 한 듯한데,
자체 무력을 갖지 못한 여왕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왕처럼 정사를 보았다기보다는,
비상체제를 평시체제로 바꾸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신라의 사정이야 어떻든 백제는 또 다시 침입을 하였고, 
여왕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을 것이나, 어찌어찌 막아낸 듯하다.
다음 해에 연호를 건평으로 바꾸었고,
분황사를 완공시켰으며 이후에도 수시로 절을 짓는 등 불교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5년째엔 옥문곡에 숨어있는 백제 게릴라를 신기를 발휘해 찾아내었다는데,
뭐로 찾아냈건 그전에 먼저,
국경 경비를 비롯한 방어시스템이 허술하여 서라벌 근처까지 적의 대규모 게릴라가 침투한 것이므로,
이는 김유신을 비롯한 당시 군부 실력자들의 실책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여왕의 신기는 이들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지어낸 프로파간다로서 일종의 물타기였을 것이다.
7년에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나,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로 성을 40여개나 빼앗겼고,
요충지 대야성을 잃었으며,
당항성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공격을 받게 되어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이 되었다.
이에 김춘추를 예전의 상국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고구려는 도움은 고사하고 김춘추를 억류시켜버렸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보내 일전 불사를 외치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당나라를 막기에도 벅찼던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고구려에 실망한 신라는 다시 당에 매달렸는데,
12년에 당태종 이세민이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없는 살림에 3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하여 응원하였으나 고구려는 멀쩡하였고,
그 사이 백제에게 성을 7개나 빼앗겼다.
이렇게 헛 짓만 하며 국력을 고갈시키는 정부를 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고울 리만은 없었으므로, 
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귀족세력의 대표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에 참여시켰다.
13년에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다시 측근 세력에게 힘을 실어 주었는데,
김유신은 신라 최고의 영웅이자, 선덕여왕의 수호천사 답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백제를 공격하여 7성을 도로 빼앗았다.
14년에는 당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도 국력을 기울여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었다.
이러한 정신 나간 짓과 무능에 열 받은 비담과 염종이 16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왕이 죽었다.

뭇 영웅들의 헌신적인 보좌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린 초유의 여인 군주.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아이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의 능력은 실망스러웠다.
신라 역사상 최고 영웅들의 보좌를 받으면서도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갔고,
여인으로서의 한계와 더불어 현실 감각도 떨어져, 주변 강대국들의 멸시를 받았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을 때마다 불교로 도피하였고,
남편 셋뿐만 아니라 많은 애인들까지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보지 못해,
그 알량한 성골도 이어가지 못하였다.
약간의 신기를 초인적인 예지능력으로 미화하는 경향도 있으나,
평범한 무당도 그 정도는 한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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