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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10:35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김유신, 위대한 삶

신라 : 김유신, 위대한 삶

김수로왕의 자손이었다.
비록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이 왕족으로 편입되어 많은 군공을 세웠고,
고위 관직에 등용되어 왕족을 아내로 맞이하였어도, 망국 가야 줄신인 그의 가문은 거기까지였다.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허울뿐인 왕족 대접에 감지덕지하며,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신세였는데,
이 태생적 비주류 가문에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고,
심상치 않은 성장 과정을 거쳐, 35세에 드디어 성명을 하게 되었다.
진평왕 46년, 낭비성 싸움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여, 신출귀몰한 무용을 뽐내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과 유대를 맺은 것이었다.
젊고, 용맹하며, 분수를 아는 이 듬직한 경상도 청년은,
불우한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장자 김용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또래인 자기 아들 김춘추와 교류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유신보다 몇 살 어릴 것으로 추정되는 김춘추는, 대부분의 젊은 애송이들이 그러하듯이,
전쟁터에서 뛰어난 무용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줄줄이 뿜어내던 영웅에게 매혹되었을 것이고,
원조 비주류 김유신 또한 신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손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므로,
두 젊은이는 서로 쉽게 의기투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동병상련의 동맹을 통해 김용춘은 비교적 단결력 높은 옛 가야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김유신은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줄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상생의 동맹은 진평왕 말기에 발생한 칠숙의 난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고,
덕분에 잠재적 불온세력으로 분류되어 자체 무력을 키울 수조차 없었던 김용춘 일파는 일약 핵심 친위세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힘으로는 정국을 지배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직속이 아닌 김유신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진평왕 사후 김용춘은,
자신이 등극하면 바로 역적으로 전락하게 되는 진평왕 옹립파들의 불안도 다독일 겸,
말도 안 되는 성골 이론을 내세우며, 만만한 자신의 처제(또는 처형)를 여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용춘은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며 권력 상층부에 진입하였고,
여왕의 남편까지 되는 기염을 토하며 폐족 진지왕계를 다시 주류로 만들었는데,
이 때 김유신은 토사구팽을 염려하였는지,
김춘추에게 혼인으로 동맹의 격을 높일 것을 요구하였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전부터 좋아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따로 자파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 입장이었으므로,
기존의 동맹을 유지,강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였는지,
이미 기혼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희를 정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개판인 신라 왕족의 족보라고 해도 정부인을 둘씩이나 두는 것은 당시에도 드문 일이었는지,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어설픈 연극까지 해야 했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건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은 더욱 단단해졌으며, 이는 곧 김춘추의 자산이 되었다.

선덕여왕 9년 의자왕의 대공세에 요충지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아마도 낙하산 인사였을 것인데,
이놈이 성주로서의 자질이 형편 없었는지 찌질한 짓을 하였고,
결국 성을 잃고 자살하면서,
저 혼자만 죽은 게 아니라 죄 없는 지 처자식까지 데리고 가는 막장 짓을 하였다.
그리고 성을 점령한 백제 장군 윤충은,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성주뿐만 아니라 김춘추의 딸과 외손주까지 모조리 효수하여,
진흥왕에게 목이 잘렸던 성왕의 분풀이를 하였는데,
김춘추가 죽은 딸과 손주들에 대해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슬퍼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대야성의 상실은,
딸을 잃은 아비의 슬픔 따위를 위로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이 아닌,
신라의 존망과 관계되는 위기인 동시에,
그 동안 김품석의 후견인 노릇을 한 정치인 김춘추의 위기였다.
영리한 김춘추는 이 국가와 자신의 위기를 넘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협상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 동안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및 대당 전선에 힘을 집중해야하는 고구려의 입장 등에 비추어, 상당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묘책이기는 하였으나,
눌지왕의 독립이래,
누대에 걸쳐 쌓인 원한 및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따른 고구려의 분노 그리고 일관된 신라의 친당 정책 등으로 인해,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나름 당대의 영웅이었던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현란한 외교적 수사에 넘어가지 않았고,
되려 김춘추를 볼모처럼 취급하여 구금시켜 버렸다.
이때 김유신은 고구려에 대해 위협도 서슴지 않는 강단을 보여주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김춘추가 간신히 귀국한 후에도 내부의 책임론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김춘추가 다시 전권대사가 되어 왜국으로 파견될 수 있게 하였다.
왜국과의 협상도 소득이 없었으나, 이번에도 별다른 문책 없이 김춘추는 다시 당으로 건너 갔는데,
이렇게 김춘추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천둥에 개 뛰듯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교 말고는 살 길이 없었던 신라의 절박함 이외에도, 김유신이라는 든든한 무력이 있었다.

김유신은 마지막 전성기를 맞은 백제와 여전한 대국 고구려의 침략을 동분서주 막아내며,
신라의 구성으로 떠올랐고, 이러한 활약은 고스란히 김춘추의 보호막이 되었다.
따라서 만일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는 애 저녁에 실각하여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신라도 망했을 것이다.
선덕여왕 말년, 비담의 난을 계기로 정치권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집중되었으나,
김춘추는 아직 진지왕계가 왕좌를 차지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겼는지,
선덕여왕의 유언을 조작하여, 여왕의 사촌동생인 진덕여왕을 화백회의의 추대도 없이 옹립하였다.
진덕여왕은 명분도, 기반도, 능력도 없는 그냥 여인이었으므로,
폐족의 부활을 꺼리는 세력들을 정리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용도로 쓰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 감각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진덕여왕기에 김유신은 대야성을 수복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등 맹활약하며 대군벌로 성장하여,
김춘추의 강력한 칼이 되어 주었고,
여왕을 꺼리는 기본적인 입장 및 김춘추가 입조하고 있는 동안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당태종 이세민이 또한 김춘추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힘을 실어 주었기에,
이 시기 김춘추는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양이나 질에서, 실질적인 신라의 군주와 다름 없없다.

진덕여왕은 고맙게도 8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자식도 없이 사망하였는데,
화백회의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회의 중에 호랑이가 난입하자 맨손으로 꼬리를 잡아 패대기를 처버렸다는 전설의 호걸,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강대한 무력으로 이를 취소시키고 김춘추를 옥좌로 밀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하였으며,
상대등이 되어 무열왕의 반대파들을 통제, 관리하였고, 매제인 무열왕의 사위까지 되어,
정권의 굳건한 지지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무열왕은 이렇게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국력을 총동원 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김유신은 무열왕이 59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기력이 왕성하여,
조카이자 처남인 문무왕의 보호자로 활약하였으며, 숙원 사업인 통일전쟁을 지속해 나갔고,
68세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여,
고구려의 포위 공격으로 다 죽어가던 소정방을 구원하면서, 고구려군을 1만 여명이나 죽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평양성 공략전에는 노쇠하여 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왕을 대신하여 내정을 맡았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나당 전쟁을 수행하다가,
문무왕 13년 7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우리 역사 상 그 누구에 못지 않는 영광스러운 삶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
서로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가지고, 완벽한 협력을 이루었으며,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실현시켰다.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도 없었을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주를 외세에 팔아넘긴 원흉으로 김춘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둘의 일생은 완벽한 이인삼각이었으므로, 김춘추를 향한 비난의 반은 김유신의 몫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경주에서 보낸 김유신 장군이,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대관령 산신이 되어 각종 민원을 들고 찾아오는 민초들의 절을 받고 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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