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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10:19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발해 : 시작, 우리 역사?

발해 : 시작, 우리 역사?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 지역에 군림했었다는데,
관련 기록이 부실하고,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마치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 성립이나 성장 과정, 그리고 신라와의 관계 등을 보면,
우리 민족과의 연계는 좀 약하고 그렇다고 아주 남은 아닌 것 같고,
과연 우리의 조상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면 한민족의 형성은 언제 부터이며 어떤 종족들로 구성되었을까 하는,
한민족의 정의나 범주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하는 나라.

민족은 근대 이후에 탄생한 개념으로서,
고대에는 민족보다는 그보다 작은 혈연 공동체인 종족이나, 문화 공동체 성격인 어족으로 묶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를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동일 민족, 한 겨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저 고구려족, 백제족, 신라족 정도의 개념으로 서로 다른 이 종족이 삼한 땅에 나뉘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한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의 여러 종족들이 역사를 함께 부대끼며 운명 공동체가 되어 가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개국 이래 신라를 소 닭 보듯 했으며 교류도 많지 않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은 커녕 전쟁조차 없었으므로, 발해를 한민족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발해족 또는 고구려족 국가 정도가 맞을 것이다.

뿌리 찾기를 해보면 한민족의 조상이 틀림없는 백제,
백제의 뿌리가 되는 고구려, 고구려의 뿌리가 되는 부여,
그리고 부여의 뿌리가 되는 고조선으로 계통이 이어진다.
따라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이고, 부여, 고구려가 우리나라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이면 고대의 거의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온 세상이 다 고토이며 사해가 동포일 것이다.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종족 구성은 한민족을 형성한 종족들과 많이 달랐을 것인데,
고구려의 멸망 후 발생한 다양한 부흥운동 중 발해만이 성공하였고,
군림하고 있던 지역이나 영토의 넓이, 국력, 구성 주민 등을 보면,
한민족과의 연계성이야 어떻든,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해가 이민족 국가라면, 고구려, 부여, 고조선도 이민족 국가가 되므로,
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다행히도, 고려가 개국되면서 고구려가 다시 우리 역사가 되었다.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살던 패서 지방을 근거로 발기한 국가로서,
고구려의 국명인 고려를 그대로 차용하였고,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하였다.
발상지가 고구려의 옛 영토이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품고 있어서,
후계자를 자처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미 200여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주 활동 무대였던 만주는 물론,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일대조차 소유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인 발해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의 고구려 후계 주장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저 건국의 명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까지였으면, 발해는 영원히 우리 역사가 아니고, 고구려도 정통이 아닌 방계 정도의 후계자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어느날 발해가 느닷없이 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200여년을 버틴, 나름의 강국 발해가 개전 15일 만에,
요나라 황자 야율요골이 이끄는 기병대에게 상경이 함락되면서 망해버린 것이다.
고구려처럼 있는 진, 없는 진 모두 빼고,
전쟁이라면 온 백성이 진저리를 칠 만큼 기진맥진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이없이 망한 것이므로,
멸망 당시 군사력이 거의 온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세력들 중 일부는 남아서 부흥운동을 줄기차게 전개 하였고, 일부는 고려로 귀화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을 포함한 대다수는 만주에 그냥 남았고, 일부만 귀화하였는데,
이게 우리가 고구려의 정통 후예이며 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까?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연합정권이었고 이 둘은 끝까지 서로 동화되지 않은 채,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발해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멸망 후에는,
고구려계는 고려로 흡수되고 말갈계는 만주에 남아, 각자 제 갈 길로 갔기 때문에,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이고 따라서 발해도 우리 역사가 분명하다고 하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게 가능할까?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 협력하며 나라를 유지해온 두 종족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나누어 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갈족. 
발해만큼 참 난해한 종족이다.
퉁구스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데,
한반도 중부에 예국을 세우기도 하고, 백제의 초창기에 백제와 피터지게 싸우기도 하는 등,
우리 역사에 툭 하면 끼어드는 종족으로,
만주 전역과 연해주, 한반도 중,북부 그리고 남부 일부까지 매우 넓은 서식지를 자랑하는데,
중국 놈들은 만주에 살고 있던 모든 종족을 싸잡아서 오랑캐란 의미의 말갈이라고 불렀다고 하므로,
이들을 단일 종족으로 보기는 무리이고,
아마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를 받거나 저항을 하던 모든 종족들의 통칭이 말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갈이라고 불렸던 이들 중 한반도에 살던 종족들은 한민족 형성에 기여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만주에 살던 족속들은 부족의 사정에 따라 발해에 동화되거나 시베리아 삼림에 묻혀 살아갔을 것이므로,
고려로 귀화한 이들 중에는 말갈계도 있었을 것이고, 만주에 남은 고구려계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로 귀부한 이들은 발해의 상층부를 이루던 자들로서 상당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지배층이야 돈도 있고 무력도 있으니 고려에서 우대하고 지배층으로 편입시켜주었겠지만, 
하층민이야 어디 그런가?
기득권들이 간다고 괜히 남의 나라까지 따라가서, 타향살이에 종살이까지 할 바에야,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게 백번 나은 일이었을 것이다.
개개인의 사정이야 무엇이든,
발해 유민들의 무력을 받아들인 후, 고려는 비로소 후백제를 누르고 통일 전쟁의 승자가 되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발해 부흥운동들이 모조리 실패하는 덕분에,
왕족을 포함해 발해 귀족들의 상당수를 포용했던 고려는 거란과 대립하며,
발해 부흥운동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고,
발해의 뿌리를 흡수한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만주를 회복해야 할 고토라고 우길 수 있게 되었다.
발해 유민들이 200년 세월을 메꿔준 셈이었다.
그리고 옵션처럼 고조선, 부여도 우리나라가 되었다.
우리 말고도 고구려, 발해의 계승자를 자처한 나라들은 많은데,
요, 금, 청 등 만주에 기반을 둔 나라들은 모두 지들이 고구려, 발해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하였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놈들의 동북공정도 그 맥락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 그 말도 맞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발해는, 당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이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이적이 보장왕과 염병할 남건이 형제를 끌고 갈 때 같이 끌고 간 고구려 백성이 20여 만이었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한 100만 쯤 되었을 테니까 인구의 1/5을 끌고 간 것인데,
아마도 평양 부근은 사람 씨가 말랐을 것이고 주요 지역들 또한 공동화 되었을 것이다.
이놈들은 끌고 간 유민들을 요서 지방의 영주라는 곳에 풀어놓았는데,
여기는 그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불모지가 아니라, 원래 거란족의 땅으로,
당시 당에 복속했던 거란족이 살고 있었다.
거란족이라고 해서 점령당한 처지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므로,
분위가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 불만의 땅에 고구려인 수십만이 도착한 것이다. 거러지의 모습으로.
당연히 텃세가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지들끼리 모여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끌려간 유민들은 유민들대로 문제가 있었다.
당나라 놈들 눈에야 그놈이 그놈 같았을지 모르나,
고구려는 신분제 사회였고 귀족 평민 노예의 3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평민은 다시 지배계층인 호민과 거의 농노 수준인 하호로 나뉘어 있었고.
따라서 유민들은 양반인 귀족과 호민, 상놈인 하호와 노예가 뒤섞여있었고,
종족도 이것 저것 뒤섞여 복잡하였을 것이다.
당나라가 귀족과 호민은 장안 등 다른 지역으로 분리시켰다 하나 완벽했을 리는 없고,
중간급들 상당수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유민들 중에는 한 번 상전이면 영원한 상전이라고 생각하는 갸륵한 종놈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 판국에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이냐고 눈을 부라리는 놈 등 벼라별 인간들이 다 있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과 평민은 사이가 안 좋고,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니,
대충 지배계층 출신과 피지배계층 출신으로 나뉘었을 공산이 가장 크다.
아니면 지역, 출신 별로 나뉘었거나.
평양 인근 출신과 그 외 지역, 성내 거주와 성외 거주자 등등. 경우의 수는 많다.
어떻게 나뉘었건 고구려 유민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지도자는 각각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였다.

고구려 유민이 날 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험난한 생활을 이어간 지 어언 20여 년, 
거란의 이진충이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이가 반란을 일으킨 해는 696년으로,
측천무후가 자기 아들을 쫓아내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로 등극하면서 주나라를 연지 9년째 되는 해이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걸물이었다 해도 이렇게 나라를 근본부터 뒤집어 놓았으니 혼란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당 조정은 분열되어 서로 죽고, 죽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당에 눌려왔던 다른 나라나 종족들에게는 호기로 작용했을 것이고,
난세의 영웅을 꿈꾸는 많은 야심가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살얼음판 같은 시국에,
불안의 땅 영주에서 도독 조문홰가 피지배 종족들의 수장들을 엿먹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뭔 실순지는 모르겠지만, 지 멋대로 세금을 걷거나 부역을 부과하거나 했을 것이다. 아니면 언 놈을 죽였거나.
아무튼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므로,
거란의 야심가 이진충은 반란을 일으켜 영주성을 점령하고 조문홰를 척살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우리의 고구려 유민은 이진충에게 적극 협력하였고.
이진충이는 주변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으나,
측천무후라고 마냥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아서,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돌궐에게 거란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진충이는 전사하였고, 이 꼴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 유민은 거란족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전화를 피하였다.

요수건너 태백산 동쪽에 성을 쌓고 자리를 잡았으나, 측천무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측천무후는 일단 두 지도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거부 하였고,
이에 열 받은 측천무후는 항복한 거란인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고 진압하게 하였는데,
이 전투에는 평민 대장 걸사비우가 더 적극적이었고 전투를 주도한 듯하나,
의욕만 앞선 것인지, 두 파벌의 단합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대패하였고,
사령관 걸사비우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걸걸중상은 그전에 병사했다고 한다. 전사라고도 하고.
무슨 이유 때문이건, 싸움에 지고 두 지도자를 모두 잃은 유민들은 멘붕이었을 것이므로,
도망밖에는 길이 없었고.
이 판국에 양반이고 종이고, 말갈이고 나발이고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다시 뭉쳤고 열심히 도망쳤는데, 천문령에서 따라잡히고 말았다.
대조영은 이판사판으로 이해고에게 달려들었는데,
궁지에 몰린 쥐가 가끔은 고양이를 물기도 하는 격으로, 덜컥 이겨버렸다.
그래도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는데,
돌궐이 측천무후에게 대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거란이 돌궐에 붙는 상황이 되면서, 
유민들은 겨우 측천무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조영은 유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는데,
그 자리가 동모산, 옛 고구려 계루부의 터전이었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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