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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6일 (금요일) 5:53 오후
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41대 헌덕왕, 어리석은 인생사

신라 : 41대 헌덕왕, 어리석은 인생사

김 언승, 김인겸의 차남으로 소성왕의 동생이다.
할아버지 원성왕 시절, 제공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고,
시중, 이찬, 병부령 등을 역임하며 실력을 키웠다.
조카인 애장왕이 즉위한 후에는 섭정이 되었으며 이어 상대등에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섰다.
시중자리에 있던 친동생과 협력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애장왕이 친정을 하며 견제를 시도하자, 809년 조카 둘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애장왕이 병사하였다고 속이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4년에 숭정을 발해에 보내어,
대인수라는 명군을 만나 중흥기를 구가하는 발해의 사정을 살피게 하였다.
6년, 7년, 8년 연속된 자연재해로 기근이 발생하여, 나라 안에 도적이 들끓었고,
11년에도 초적이 일어나는 등 뒤숭숭했는데, 나라 밖 사정도 좋지 못하여,
당에서 이사도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당의 파병요청에 응하여 3만의 토벌군을 파병해야 했다.
12년, 13년에도 연속 기근이 들어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들까지 있었는데,
다음 해 14년에 그 유명한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다.

김헌창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명주군으로 물러나 있던, 무열왕계의 좌장 김주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정에 참여하였고,
시중의 자리에도 여러 번 오르는 등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헌덕왕이 녹진의 인사원칙에 따라 중앙 요직에는, 무열왕계와 같은 잠재적 경쟁자들을 배제하고,
자기 직계 자손을 비롯한 측근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김헌창도 무진주 도독, 청주도독, 웅천주 도독 등으로 계속 전보되었다.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았을 김헌창은, 웅천주로 전보되었을 때 더 이상 못참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침 연속되는 자연재해 및 기근으로 인해 팽배해 있던 사회불안과 맞물려,
순식간에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김헌창은 한 차례 거병으로,
자신이 도독으로 있던 웅주를 중심으로 무진주(광주와 전남), 완산주(전주와 전북), 청주, 사벌주(상주와 경북 서북 대부분)를 장악하였으며,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의 사신(장관) 및 여러 군, 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는데,
이는 백제의 전성기 시절에 맞먹는 영토를 확보한 셈이었으니 그 호연지기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에 나라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 전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통일을 위한 국가 간 전쟁이라고 선전하였으나,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는 실패하여,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명주군국과 연계를 맺는 데는 실패한 것이 뼈 아팠다.
장웅에게 영천 싸움에서 패하며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고, 삼년산성이 있는 보은 싸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성주 전투 등 각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웅주로 몰렸고, 웅진성에서 농성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약 1개월에 걸친 반란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김헌창은 자살하였다.
일장춘몽이었다.

17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북한산주에게 진압되었다.
그 후에도 김범문은 미련을 못버리고 다시 한 번 봉기하였으나, 이건 그냥 발악 수준이었고.
이후 무열왕계의 후손들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무진주에서 머리 2, 몸 2, 어깨 4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샴쌍둥이이었나 보다.
이 해에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동강 가에 300리 장성을 쌓았고,
이듬해인 826년에 사망하여 굴곡진 인생을 마쳤다.

18년간의 재위였다.
생기발랄한 조카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왕위에 올랐으나,
자연재해와 기근, 그리고 반란에 시달리느라 주름 필 날이 없었다.
대외 여건 또한 썩 우호적이지는 않아 없는 살림에 성을 쌓아야 했고 파병도 해야 했다.
이러니 민생은 도탄이었고 산에는 산적, 들에는 초적, 해안가에는 해적이 창궐하였는데,
일본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신라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김헌창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전국적 단위 반란을 만났고,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바람에,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음은 물론,
국가 기간 방어 시스템까지 무너져, 귀족들의 사병이나 화랑 집단에 의지하여 겨우 진압하였는데,
이는 결국 후대에 장보고와 같은 지방 호족세력이 난립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들려고 조카들에게 그 몹쓸 짓을 한 것…은 아니겠으나.
참으로 어리석은 게 인생사라 아니할 수 없다.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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