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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2월 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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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0대 산상왕, 형사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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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는 연우, 산상릉에 장사 지내서 산상왕이다.
신대왕의 넷째 아들로,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사연이 좀 있다.

고국천왕이 갑자기 사망하자 왕후 우씨는 남편이야 죽든 말든 자기는 왕비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미 사장되다시피 했던 형사취수의 전통을 되살리기로 마음먹고 두 시동생들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그 시험이라는 게 정력 테스트였다는데,
형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세째 발기는 패륜의 의심을 받고 자살한 호동왕자 꼴이 될까 두려웠는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발기하지 않았으나,
네째 연우는 냉큼 응해 왕위에 오르 수 있었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시험에 떨어져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발기는,
고국천왕 때의 첫째 발기처럼 발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엔 연나부가 아니라 소노부가 도왔다고 한다.
발기는 왕궁까지 포위하였으나 다른 세력의 호응이 없어 실패하였는데,
그래도 굴하지 않고 요동으로 탈출하였고, 공손씨의 힘을 빌어 수도를 재차 공격하였으나,
막내 동생 계수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진행 과정을 보면 결말 부분만 약간 다를뿐, 고국천왕 때의 첫째 발기와 반란 과정이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고국천왕과 산상왕이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 듯하다.
발기가 죽은 후 소노부 3만여 가가 요동으로 투항했다고 하는데,
소노부가 통째로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3만여 가는 너무 많다.

시동생의 아내가 된 문제의 여인 우씨는 선천적 불임이었는지 또 아이를 가지지 못했는데,
어느날 산상왕은,
국가 제사의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탈출한 돼지를, 기지를 발휘하여 잡은 똑똑한 시골 처녀를 치하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얼굴도 이뻤는지 통정까지 하였다고 한다.
일회성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만남이었겠으나,
전생의 인연이라도 있었는지, 이 여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자기 새끼를 가진 여자를 언제까지나 내연녀로만 둘 수 없었던 왕은 후궁으로 들이고자 하였는데,
이에 드센 여인 우씨는 질투의 감정을 섞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은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임신한 평민 처녀를 무사히 후궁으로 들여 후사를 볼 수 있었고,
이후 열심히 애 키우며 살다가 227년 서거하였다.
재위기간은 30년, 사망 나이는 모른다.

산상왕에 대한 기록은 반란과 왕후 우씨와 얽힌 일화들이 대부분인데,
그 외 눈에 띄는 것은 즉위 다음 해부터 환도성을 쌓아 10년 만에 도읍을 옮겼고,
217년 후한의 하요가 1천여 가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책성에 이들을 안치하였다는 정도이다.

기록만 보면 쓸데없이 소란하기만 한 인생을 산 것 같으나, 나름 실속있는 삶이었다.
천도는 정치 지형을 일거에 바꿔,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빅 이벤트로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눌러야 할뿐만 아니라 재력도 상당해야 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이것을 실현했다는 것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며 살았다는 의미이고,
공신이랄 수 있는 형수이자 마누라인 우씨의 질투를 꺽고, 후궁을 들여 후사를 이은 것 또한,
욕정처리 미숙이 아니라,
형제상속의 고리를 끊고 부자상속을 정착시킨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고구려의 면모를 일신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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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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