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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2월 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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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11대 동천왕, 관구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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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에 살던 평민이었다.
이 여성분은 처녀시절 국가의 교체(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떡을 이용해 잡는 기지를 발휘하였고,
영리한 것이 이쁘기까지 했는지, 칭찬하기 위해 방문한 산상왕과 하루만에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남편의 바람을 안 왕비 우씨는 길길이 뛰었으나,
이 신데렐라는 이미 임신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후궁 소후가 되었는데, 기특하게도 대를 이을 아들까지 낳아 주었다.
이는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공동 왕비이자 드센 여인 우씨의 불임으로 요원했던 부자 상속이 드디어 가능해졌다는 의미였으므로,
산상왕의 외도는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쾌거였던 셈이다.

어머니의 일화로 인해 교체로 불렸던 동천왕의 정식 이름은 위궁으로,
태어날 때 태조대왕처럼 바로 눈을 떠서 사물을 바라보았기에 태조대왕의 이름인 궁을 넣었다고 한다.
이름이야 거창하든 말든, 이래저래 심사가 복잡했던 왕비 우씨는 하던 도발을 계속하였으므로,
어머니의 출신이 한미하여 태어나기도 쉽지 않았던 이 어린 왕자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별명을 가진채 이런 저런 수모을 겪으며 자라야 했다.

19살 나던 227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삼국 정립기였으므로, 삼국의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치세 초기에는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이후에는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요동의 공손연이 연왕을 자칭하며 깝죽대다가, 제갈공명의 호적수 사마의에게 맥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자 상황이 복잡하게 변하였다.

242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겁도 없이 요동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는데 별 재미를 못 보았고,
오히려 2년 뒤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는 나와바리의 잇점을 살려 고구려가 승리하였으나,
황건적의 난 이래 거의 반세기 동안 전쟁으로 날이 지고 새는 세월을 보낸 위군의 전술은,
지금까지 툭탁거리던 애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결국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환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이듬해 관구검의 재 공세에도 싸우는 족족 패하였고, 왕은 열심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현도태수 왕기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를 끝장내려고 하였는지,
집요하게 추적하여 고구려군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암담한 상황이었으나, 고구려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만고의 충신 유유가 적의 선봉장과 동귀어진하고 밀우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가까스로 위군을 몰아내고 환도성을 되찾은 것이다.
의지의 고구려인들이 일궈낸 눈물겨운 승리라고 아니할 수 없으나,
수복한 수도는 위군의 약탈과 방화로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다.
이해에 신라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럴 정신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로부터 2년 후 248년에 서거하였다. 향년 40세.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너무 많아,
새 왕이 자살을 금하였으나, 장례일이 되자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고 그 땅을 시원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왕비 우씨의 적개심과 멸시를 참고 견디며 자란 동천왕은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생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평소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다고 한다.
그 덕에 온 나라가 초토화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배신당하지 않고,
당대 최강인 위군을 결국 격퇴하였으며,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덤에 얽힌 일화를 하나 더 보면,
두 남자의 여인 왕태후 우씨는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 옆에 묻혔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긴 고국천왕이 무당에게 현몽하여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국천왕의 무덤을 7겹의 소나무로 가렸다고.

일화도 많고 다사다난 했지만, 훌륭한 성품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의 본격적인 침입에 단호히 맞서 싸우는 고구려의 위용을 처음 선 보인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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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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