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C
Seoul
2020년 9월 23일 (수요일)
Home 오피니언 역사 고구려 : 26대 영양왕, 마지막 명군

고구려 : 26대 영양왕, 마지막 명군

- Advertisement -

휘는 대원, 평원왕의 맏아들로 25년 동안 태자로 재직하였고,
590년 왕위에 올라 즉위 초반 3년간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5년 간은 관계가 냉랭했는지 사신을 교환한 기록이 없고,
즉위 8년 째에 비로소 조공을 재개했으나,
9년에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1만의 말갈 기병으로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공격하였다.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열받은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으로 쳐들어 온 것이
1차 여수 전쟁인데,
다행히 장마와 질병이 수나라 군대의 발목을 잡았고, 강이식이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방해하고 재 침공을 부탁하는 등 밉상짓을 하자,
격노하여 바로 백제를 침공하였고,
603년에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나제동맹과 티격태격하는 동안 문제의 인물, 수양제가 등극하였다.
양제는 돌궐을 정복하고 고구려마저 굴복시키기를 원하였는데,
수나라의 침입을 예상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재위 23년째에 113만 여명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군을 동원한 수양제의 침략을 받았으나,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물리쳤고,
이듬 해에 미련을 못버린 수양제의 재 침공을 받아 다시 위기에 몰렸으나,
다행히 수나라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발생하여 이 염병할 놈들이 스스로 물러났다.
다음 해에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양제의 침입을 또 받았으나, 
이 때는 수나라가 반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여서 잘 달래어 돌려보냈다.
재위 29년 수양제가 피살되면서 수나라가 멸망하였는데,
그로부터 6개월, 618년 음력 9월에 영왕왕도 서거하여 고단하였으나 위대했던 삶을 마쳤다.

통일된 대륙의 힘은 무서웠다.
2차 전쟁 시 동원 인력은 병사만 113만, 다른 부용 인력까지 합치면 300만이 넘는다는 연구가 있는데,
300만이면 당시 고구려의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 엄청난 힘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소수 정예 전투 집단으로 막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한다는 것은 당랑거철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나,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비롯한 당시 전쟁 지휘부의 뛰어난 능력과,
귀족, 평민할 것 없이 일치 단결한, 고대사에 드문 거국적 저항으로,
이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는 평원왕과 영양왕의 인자한 정치와, 수나라 성립과정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세력 등이 합작하여
이루어낸 기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왕은 거창한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어,
광개토대왕 못지 않게 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고양시킨 분으로,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성군이었다.

태학박사 이문진이 유기 100권을 압축해 신집 5권을 편찬하고, 담징이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것도 이 시기이다.

청년과 청소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
“취재원과 독자는 수완뉴스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보도를 청구할 권리를 가집니다.”
<ⓒ 수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수완뉴스는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수익의 일부를 배분 받을 수 있음.
일부 기사는 광고주의 지원을 받아 게재된 기사일 수 있음.

해당 기사를 보고 마음에 들었다면, 수완뉴스에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donaricano-btn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 Advertisment -
- Advertisment -
- Advertisment -

인기 기사

최신 기사

- Advertis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