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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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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27대 위덕왕, 한 많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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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 위덕왕

이 양반의 태자 시절을 보면 마치 근구수왕을 보는 듯하다.
용맹이 대단해 고구려 군과 싸울 때 일기토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사이도 좋아 국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패기만만한 멋진 태자였던 것이다
성왕이 근초고왕처럼 성공하였더라면 위덕왕도 해피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나.
자신이 주도한 관산성 싸움에서, 아버지 성왕이 복병에 걸려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암울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잃게 되자, 열 받은 태자는 신중론을 펴는 귀족들을 누르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북벌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는데,
진흥왕이라는 명군 덕에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위덕왕의 성질을 받아주지 않았다.
지원 나온 아버지 성왕이 사망하고 태자 자신도 포위되어,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죽고서야, 겨우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죽고 싶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위덕왕은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중이 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왕위는 이었으나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북벌을 주장, 주도하고 패배하여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정치적 책임은 위덕왕을 평생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왕들이 고생 끝에 강화한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소위 대성팔족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되었다.

왕권이 약화되었어도 신라에 대한 복수는 중요한 정치적 명분이었으므로,
신라와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나 진흥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적의 적인 사이가 되어,
서로의 묵인 하에 번갈아 백제를 공격하는 짜증나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고,
열 받은 신라의 공격에 애꿎은 가야만 망하고 말았다.
가야 합병의 주역은 우산국을 병합한 이사부와 미실의 연인 사다함이었다.

근성은 아신왕을 비롯해, 면면히 내려오는 백제 왕실의 내력인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진흥왕이 죽자, 호기라고 판단했는지 16년 만에 신라를 또 쳤으나,
패배하였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울분의 세월을 보내던 중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위덕왕은 수문제를 충동질하여 전쟁을 부추겼으나,
1차 여수 전쟁에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위덕왕은 수문제를 재차 충동질하였으나,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도리어 고구려의 보복 공격만 받았다.

이렇게 되는 일 하나 없는 좌절의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은 상당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후계를 아들이 아닌 나이 많은 동생이 이었다.
뭔가 찜찜하지만 속사정을 알 길이 없다.

재위만 45년, 참으로 한 많은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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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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