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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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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31대 의자왕,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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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을 탄압하고, 삼천 궁녀로 상징되는 향락과 퇴폐로 나라를 말아먹은 못난이로 알려져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잘났던 아버지보다 더 잘난,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을 초라하지 않게,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던 뛰어난 군주였다.

무왕의 장자로 태어났는데, 모계가 불확실 한 것으로 보아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난 듯하다.
무왕의 정비는 사택지적비로 유명한, 당시 백제 최대의 귀족 사택씨인데,
정비의 자식이 아닌 의자왕은 사택씨의 견제로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태자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필 증자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처럼 유학을 좋아했나 보다.
기세등등한 계모와 외척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그랬을 것이다.

641년, 살얼음판 같았을 9년 간의 태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엔, 당태종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며,
별명에 걸맞게 유교 이념을 정치에 적용시키며 민심을 다독였다.
이듬해엔 대대적인 친정을 하여,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신라가 병탄했던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으로, 선대의 숙원을 이룬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업적인데 의자왕은 그해 가을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대야성은 당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로 있었던,
가야지역을 통치하는 거점이자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신라의 목줄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로써 신라는 반 쯤 죽은 것이 되었다.
윤충은 김춘추의 사위, 딸, 외손주들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하는데,
이 또한 성종의 앙갚음을 반 정도는 한 셈이었고.

재위 초의 의자왕은 안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고 밖으로는 숙적 신라를 공격하여,
정치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43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 한편,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가 당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하였다.
비록 당항성은 당의 압력때문에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이후에도 거의 매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최강국이었다.

신라는 당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당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에 의자왕은 당의 잇따른 군사적 실패 및 오랜 숙적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 등으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당을 버리고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종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적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목을 조였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사방으로 포위된 신라는 김유신의 분전으로 겨우 연명하며 당에 비명을 질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국력 신장과 군사적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된 의자왕은 계모 사택비의 사망 이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사택씨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으며, 계백, 흑치상지 등 친위세력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이때 자신의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모조리 자식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식 뻘의 왕족들이었을 것이다.
마치 근초고왕의 재림을 보는 듯하다.

의자왕은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후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후대에 악평의 원인이 된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이 때 대부인 은고의 전횡 및 태자의 교체 그리고 성충, 흥수의 투옥 등 내부의 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틈을 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고종은 대 고구려 전쟁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신라도 구할겸, 백제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는 개국한지 678년째인 660년,
소정방의 13만 당군과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의 연합 공격에 의해 무너졌는데,
이는 당군의 기벌포 상륙으로부터 고작 10일만으로, 당시 백제의 국력이나 의자왕의 역량에 비추어 너무도 허무한 결과였다.

액면만 보면, 잘하다가 갑자기 노망이 나서 한순간에 나라를 말아먹은 꼴이나,
고대에서 왕의 사치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으므로,
재정만 받쳐준다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경기 부양 효과도 있고.
그리고 충신들은 숙청했다는 내부 혼란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당이 직접 공격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직접적인 패인이었고,
고질적인 중앙과 지방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난의 시기에도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이유가 되었다.
부흥운동에서 나타나는 그 저력을 당과의 싸움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면,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자왕은 낙화암의 전설을 남기고 당으로 끌려가 얼마 후 병사하였는데,
이 삼천궁녀 이야기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로 유추하여 볼 때 궁녀를 3000명 씩이나 채용할 수 없고,
전국에서 조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 늙은 왕의 이러한 만행으로 혼인 기회를 박탈당한, 왕권의 기반이라고도 할 수있는 젊은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므로,
만일 의자왕이 전대미문의 폭군에 호색한이라 실제로 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면,
그 행적이 외국의 사서에라도 남아 있을 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이 전설은 백제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에서 조작한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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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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