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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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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23대 법흥왕, 불교 그리고 개혁 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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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원종 또는 모즉지, 원종은 개명일 것이다.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소지왕의 사위 자격으로 514년 왕위에 올랐다 하는데,
이 동네 족보는 워낙 복잡하므로 공동 아들일 수도 있고 조카에 당숙에……
아무튼 여러가지 신분이 복합되어 계승 1순위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재위 4년,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였고.
7년에는 율령과 관제를 반포하고 관료의 복식을 지정하여 중앙집권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14년에 이차돈이 하얀 피를 흘리며 순교하였고, 15년에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18년에는 상대등을 임명하여, 6부의 귀족 세력들을 관료체계에 포함시킴으로써,
왕실은 6부의 하나인 탁부의 대표가 아니라,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19년에는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낙동강 유역을 손에 넣었고, 덤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까지 얻었다.
23년에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말년에 흥륜사에 출가하여 법공 화상이 되었고, 바로 사망하였다.
재위는 27년, 시호는 법흥이다.

남들은 한참 전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고 일차 전성기까지 지났는데,
지진아 신라는 이제야 제대로 모양이 나오는 고대국가가 되었다.
그만큼 신라가 후진적인 사회였다는 뜻일 것이고, 이 한심한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은 불교 도입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도입 과정에서 많은 피를 뿌려야 했고, 정착을 위해서도 많은 진통이 필요하였다.

왕즉불 사상에 따라 왕가와 석가모니의 가계를 동일시하였고,
토속신앙의 아성인 일곱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우기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사업을 벌였는데,
이는 왕실에 부처의 권위를 부여하여, 기존 질서를 뿌리부터 파괴하는 짓이었으므로,
대대로 토속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전 소지왕 대의 신궁 설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제 밥그릇을 빼앗기는 법은 없으므로,
법흥왕의 정책도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딛혀, 짓던 절을 때려 부쉈다가 다시 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절들 중 유명한 것이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 등으로,
어찌보면 가소로운 사기이거나 무리한 밀어붙이기 처럼 보이기도 하나,
법흥왕의 불교 도입과 왕즉불 사상을 이용한 왕권강화는 결과적으로 샤머니즘이 판치던 부족 연맹체 수준의 신라를 명실상부한 고대 왕권 국가로 탈바꿈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법흥왕은 이렇게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혔고, 후대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상당한 명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왜구의 준동이 없었다. 이놈들에게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
맛이 간 백제를 지원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제동맹이 확장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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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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