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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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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26대 진평왕, 성골을 만들다

이름은 ‘백정’, 현대의 어감으로는 좀 거시기 하지만,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이라 한다.
왕후의 이름은 ‘마야’, 부처의 모친 이름이고.
동생들의 이름은 ‘백반’ ‘국반’, 실비 식당 음식 메뉴 같지만, 모두 부처의 숙부들 되시겠다.
이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진흥왕은 전륜성왕이고, 아버지는 전륜성왕의 세번째 화신 ‘동륜’이니,
그야말로 로열 훼밀리에 정통, 적통을 망라한 셈이었다.
따라서 이제 아들만 낳으면, 대망의 석가모니가 신라에 출현한 꼴이 되어 불국토를 구현할 수 있었는데,
이 경상도 촌놈들의 부처 놀이에 부처님도 짜증이 났는지, 아들은 안 주고 줄줄이 딸만 주었다.
이름하여 천명, 덕만, 그리고 실재를 의심받는 전설의 공주 선화.

아들이 없어 부처는 못 만들었어도 기왕에 만든 스펙이 아까웠는지,
진평왕은 자신의 직계만으로 성골을 만들고,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그러나 뒤를 이은 선덕여왕이 수 많은 남편들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여,
아쉽게도 성골이 단절되고 말았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지왕 ‘철륜’의 손자이기에,
전륜성왕의 자손이기는 해도, 석가모니의 직계인 진평왕과는 촌수도 멀고,
무엇보다 폐왕의 직계라서, 성골이 못되고 진골이 되는 모양이다.

진평왕은, 석연찮은 이유로 폐위 당하고 죽은 진지왕의 뒤를 이어 579년 왕위에 올랐으나,
이후 5년 동안은 진지왕의 모후인 사도태후 박씨의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액면만 보면 사도태후가 아들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모양새이므로,
화랑세기에서, 정신 나간 아줌마처럼 미실에게 이용만 당하는 사도태후가,
사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미실을 이용한 무섭도록 냉정한 정치가로서,
마치 권력에 눈이 멀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냉혹한 여인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이 살벌한 섭정의 눈치를 보아야 했을, 1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되는 진평왕은,
재위 2년 째에 스스로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각종 관서를 설치하는 등 중앙관제를 개혁하였다.
어린아이치고는 썩 매끄러운 일처리인데,
이는 진평왕이 정치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신동이라, 권력의 화신인 섭정을 상대로 온갖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도 진평왕을 옹립한 혁명세력들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태후는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그저 방패막이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진실이 무엇이고,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당사자들이나 알 것이나,
아무튼 진평왕은 6년에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며 명실상부한 친정을 시작하였고,
15년에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아 방비를 강화했으며, 지방 제도를 개혁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24년 백제가 아막성으로 처들어 온 것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성도 자주 빼앗기는 바람에, 영토가 진흥왕 이전으로 축소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한강유역 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켰고, 중국의 황조들에 매달려 생존을 도모하였다.
31년 모지악 아래의 땅이 9달이나 불탔다는데, 소규모 유전이었을 것이다.
재위 50년째에는 빈번한 외침과 자연재해로 고초가 극심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자식을 내다파는 참상까지 있었고.
51년에는 모처럼 고구려를 공격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김유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53년에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였으며,
이듬해에 사망하여 54년의 길고 긴 재위를 마쳤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나 거구였고 힘이 장사였는지 한 걸음에 계단 두 개를 한꺼번에 부숴버렸다고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더불어 신라의 삼보로 칭해지는,
하늘이 준 옥대를 차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 위엄과 권위가 있는 왕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구석에 짱 박힌 소국의 왕 주제에 부처의 아비네, 성골이네 하는 꼴이 같잖아 보이기도 하고,
이 부처놀음이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강국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지 괜히 민망해지기도 하지만,
당시 신라 왕실의 상황이, 이복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고, 고모와 조카가 결혼하며, 심지어는 할아버지의 첩이었던 여인과도 동침하는 등, 상하 원근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족보가 난장판이었기에,
이에 넌더리가 난 진평왕이 특단의 조치를 고심한 끝에 이런 짓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진평왕은, 대부분 왕족이고 친척이니 웬만한 신분으로는 권위를 세우고 질서를 잡기는 커녕, 공연히 반발만 부르기 십상이라고 생각하여,
기왕 뻥튀기기를 하는 김에 통 크게, 부처의 가계를 ‘복사’하여 자신의 직계에 ‘붙이기’를 해버린 듯한데,
비록 이 꼴이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 같아 우습기도 하고 나중에 부작용이 만만찮은 꼴통제도가 되긴 하지만,
샤머니즘의 전통이 강하고 국가의 응집력이 가장 약했던 당시 신라의 사정상,
이렇게 왕즉불 사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직계를 다른 귀족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 말고는,
말도 안되는 혼인을 통한 여러 겹의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신라의 원시적인 관행을 근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를 낳아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황당한 망상으로 골품제도를 만들었고,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원수가 된 고구려, 백제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바람에,
수, 당에게 저자세 굴욕 외교가 무엇인 지를 제대로 보여준 꼴불견의 이미지이지만,
문란한 왕실 여인들의 준동을 다스리며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개혁하였고,
원광법사로 상징되는 불교세력을 적절히 이용하여 화랑도를 국가 인재 발굴 시스템으로 정착시킨 업적도 있었다.
장수왕의 78년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상 손 꼽히는 54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 비해 업적이 빈약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오랜기간 왕의 교체에 따른 혼란이 없었기에 개혁한 제도가 확고해 질 수 있었고,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변경 주민들을 제외한,
당대의 신민들의 삶 또한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하게 되어 안심하고 생업에 몰두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을 진평왕의 진정한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름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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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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