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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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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나당전쟁, 한겨레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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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진행 된, 삼한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다.

삼국 중 가장 약했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통일 전쟁 직전까지도 나라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였기에,
살기 위해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고구려의 배후에 위치한 신라의 전략적 가치를 역설하여 동맹까지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현격하였으므로 감히 대등한 동맹은 말도 꺼내지 못하였고,
달라면 주고, 하라면 하고, 어쩌다 뭐 하나 던져주면 감사히 받는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 종속되든 말든 일단 살고 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통일전쟁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면서 시작되었다.
당연히 주력은 당군이었고 신라는 주로 보급부대의 역할을 하였는데, 
당군은 명성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며,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를 순식간에 괴멸시켰고, 그동안 대륙세력에 대해 방파제 역할을 해왔던 강국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종노릇을 하긴 하였으나,
당군이 대부분의 결정적인 전투를 수행하였고, 병력손실도 신라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고구려, 백제의 위협으로 부터 신라의 안전을 확보해 준 이상, 쌀 배달이나 했던 신라와 전쟁의 수확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영토에 괴뢰국을 세워,
점령지의 항복한 수장에게 벼슬을 주고 자치를 허용하는 온정적 식민지 통치방식인,
기미지배체제에 의한 통치를 시작하였다.

665년 8월, 당나라 칙사 유인원의 주관 하에 웅진의 취리산에서 전 백제 태자 부여융과 문무왕 간의 회맹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부여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된 직후였고, 문무왕 또한 이미 4개월 전에 계림도독으로 임명된 상태였으므로,
이 회맹은 당의 관리들인 웅진도독과 계림도독간의 양자 회담으로서,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라와 백제는 서로 침범하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충고까지 들어야 했는데,
이는 당나라가 지들 나름의 기미지배체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것으로,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신라 입장에서는 간신히 멸망시켰던 백제의 옛 자리에, 예전 한사군처럼 중국의 식민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겁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는 648년 당태종과 무열왕 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로서,
승자인 문무왕이 패자인 부여융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매우 열 받는 일인 동시에,
신라 또한 이놈들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는,
지금까지 헛고생을 하였으며, 나라의 존립 또한 오히려 전쟁 전 보다 더 위험해졌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짜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신라는 이판사판 붙어보는 수밖에 없었고,
결과야 어떻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심정으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670년 3월, 진골도 아닌 설오유가 당시 신라 국력으로는 대 부대라 할 수 있는,
2만의 기. 보 혼성 부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선제공격하였다.
뭔 배짱인가 싶지만,
이는, 당이 바로 전 해에 있었던 대비천 전투에서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에게 개망신 당하는 꼴을 보고,
얘들 사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감을 잡은 문무왕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베팅한 것으로 보인다.

설오유 부대, 빨치산 부대 이름 같기도 하고… 하는 짓도 비슷했다.
이 부대가 엄동설한에 산 넘고 물 건너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행군을 하였고,
요동의 오골성을 전격적으로 공격, 박살냈으며, 백성으로 물러나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당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나, 그러건 말건,
당나라 놈들 먹이고 입히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신라가, 이렇게 정예한 특수부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신라가 얼마나 열을 많이 받았으며, 당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었는 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신라는, 일종의 양동부대인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7월부터 백제 땅으로 대규모 진격을 개시하여 80여 성을 전격적으로 함락시켰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671년 6월에는 석성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고,
10월에는 당나라 선박 70여척을 박살내고 군사 1백 명을 사로잡는 성과도 올렸다.
전격적인 신라의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당이 제대로 한방 먹은 셈이나, 당은 역시 강국이었다.
바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672년 7월 고간과 이근행이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백수성 근처에서 신라군과 교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는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것이 석문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원술랑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가 아버지 김유신에게 맞아죽을 뻔했고, 문무왕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느나, 
결국 파문당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산속에 숨어 살아야 했다. 연개소문의 자식 교육과 비교된다.
이 패전으로 야전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된 신라는 이후 수성전에 치중하였고, 
당에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673년 7월 1일, 당과의 싸움이 열세인 상황에서 신라의 정신적 지주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원술랑이 다행으로 생각하…지야 않았겠지만, 아무튼 신라 조야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반란이 발생하는 등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었는데,
이미 수도 없는 위기를 겪었던 문무왕은 침착하게 위기를 넘겼고, 꾸준히 성들을 증축하고 보강하며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당의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는 아홉 차례를 싸워 모두 승리할 수 있었고, 당나라 놈들 목아지를 2천여 개나 도려내었다.

674년,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하는 등 대동강 이남에 대한 권리 행사를 노골화 했는데,
이에 당 고종은 격노하여, 꼴같지도 않은 계림도독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했으며, 신라를 공격하였다…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섭정을 하는 시기였고, 당 고종은 병석에서 빌빌대고 있었다.

675년 2월, 유인궤가 칠중성을 깨뜨렸고, 이근행이 다시 신라를 공격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다.
그러자 당 고종(측천무후일 것이다)은 관작을 회복시켜주며 군사를 물렸는데, 신라는 이 틈에 백제 전토를 수복하고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공격하였다.
우리가 볼 때는 참으로 눈부신 화전양면 전술이 아닐 수 없으나, 당나라 놈들은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9월에는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했으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베고 전함 40여 척, 군마 1천 필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이근행이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싸워 군마 3만여 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이게 나당전쟁 최대의 승리라는 매소성 전투인데, 당군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문무왕은 이때에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의 방물을 바쳤다…는데,
보내는 사람도 어지간하지만, 보낸다고 받는 측천무후도….이것 저것 정신 사나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신라는 이후로도 아달성, 석현성, 적목성 등지에서 당군과 격전을 벌였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676년 11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서해로 쳐들어왔으나, 기벌포에서 시득에게 막히며 체면을 구겼는데,
이후 당은 티벳의 가르친링에게 얻어맞느라 신라에 대한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으므로,
이것이 당의 마지막 공격이 되었다.
마침내 나당전쟁이 끝이 난 것이다.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은 것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약소국의 몸부림이었다.
이 몸부림이 어찌어찌 통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동참하게 되었고, 강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없애버린 자리에 대신 들어선 최강대국 당은 신라를 다시 생존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 된 신라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으나,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 중에 야기된 당조정의 혼란과 때 맞춰 등장한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의 활약 덕분에,
문무왕은 도박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전술로 이래저래 머리 아픈 당군을 괴롭혀, 결국 당의 전쟁수행의지를 꺾어 버렸다.

신라에게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된 조국을 만들겠다는 사명감 따위는 쥐뿔도 없었을 것이나,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은 삼한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7년 간의 나당전쟁은, 삼한의 백성들을 부조의 원수에서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운 동지로 바뀌어 주었다.
그리고 무슨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었기에, 이놈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신라는 포용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 또한 나라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므로, 한반도의 제 종족들은 결국 신라의 이름 아래 한 민족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당 전쟁은 한민족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전쟁이며,
이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한 문무대왕은,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든,
한겨레의 실질적 시조라 불리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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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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