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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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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8대 현종, 위대한 임금님

어머니 헌정왕후는 불행한 사랑을 한 여인이었다.
남편 경종이 사망한 후 돌 볼 자식도 없이 궐을 나가야 했던 젊은 그녀는,
외로웠는지 아니면 심심했는지, 그만 이웃에 살던 숙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숙부가 유부남이었다.
현대적 관점이라면 유부남이 아닌 숙부와의 사랑만으로도 갈 데 없는 패륜이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랑스러울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다지 큰 흉이 되지도 않는 일이었으므로, 
여염이라면 그냥 저냥 만나서 살다가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국가질서 확립을 국정철학으로 삼았던 현왕의 여동생이자, 태후라는 그녀의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이놈의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숨어서 먹는 열매가 더 달콤한 것처럼 하지 말라면 더하고 싶어지는 습성이 있는지라,
이 고귀한 신분의 연인들도, 헤어나지 못하고 위험한 관계를 지속하다가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다.
비록 혼외 관계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왕가의 경사이고, 둘 다 권력과 재력을 겸비하였으므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단 꿈에 젖어 행복하였는데,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난데없이 집안 종놈이,
남 다른 정의감을 지녔는지 아니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기지까지 발휘하여 성종에게 상전의 불륜을 제보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만의 아름다웠던 사랑은 세상에 노출 되어, 왕실의 권위에 먹칠한 패륜이라는 낙인으로 탈바꿈되었고,
온갖 비난을 다 뒤집어 써야 하는 쓰라린 상처가 되고 말았다.
결국 숙부이자 연인인 유부남 왕 욱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상심한 헌정왕후는, 
사랑의 결실을 무사히 세상에 내보내기는 하였으나,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고려판 신파 소설을 완성하였다.

왕 순은 태어나자마자 죄인의 자식에, 어미 없는 자식으로도 부족해 왕실의 치부까지 된 것인데,
어려서야 몰랐겠지만 철이 좀 든 다음에 생각해 보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도덕군자 성종은 고아나 다름없는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와 살 수 있게 해주었으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왕족의 팔자는 서민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고, 부모의 행실은 미워도 애는 죄가 없으므로, 
성종은 그를 궁궐에서 자라도록 배려하였고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덕분에 왕 순은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만은 못해도, 외삼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자랄 수 있었으나,
성종 사후 목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꼬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처럼 사랑에 눈이 먼 이모 천추태후는, 
큰아들 목종이 게이인 관계로 후사를 보기 어렵게 되자, 둘째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는데,
문제는 이 둘째가, 재회한 연인 김치양과의 사랑의 결실인지라,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사실이었다.
천추태후가 아주 야무진 꿈을 꾼 것인데,
반면 왕 순은 비록 사생아이기는 했으나, 
왕 건의 피를 겹으로 받아 유전자 일치율이 37.5%에 달하였고,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한 애답게 철도 일찍 들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 없는 자식은 똘똘한 것도 죄가 되는지, 
냉혹한 이모는 이 불쌍한 조카가 자신의 가능성이 희박한 꿈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고,
일찌감치 권력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하여 신불사로 출가시켜 버렸는데,
목종의 난행으로 자신도 믿지 못하던 꿈이 점점 가까워지자, 조카의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왕 순은 팔자에 없는 중노릇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연속되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내 팽개친 효자 목종마저도, 
다음 대 왕위가 김씨에게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고귀한 인물의 고난에, 의협심을 자극받은 신불사 중들의 적극적인 보호 덕분에, 
천추태후의 암살 시도는 번번이 빗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넘겨야 했던 왕 순으로서는 서럽고도 분통터질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다 결국 죽겠다는 그의 절규는 목종의 마음을 움직였고,
세상만사 귀찮은 목종은 강조에게 왕 순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동안 알뜰하게 망가진 나라 시스템은 명령의 전달과 시행에서 혼선을 일으켰고,
갈팡질팡하던 강조가 어떨결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졸지에 왕이 되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1009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왕들의 등극 호발 연령인 낭랑 18세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처음에는 당연히 허수아비였는데, 허수아비건 뭐건 이모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나,
그 기간은 아쉽게도 짧았다.
즉위 이듬해에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해온 것이다.
닥닥 긁어모은 30만의 대병을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출병했던 독재자 강조는,
어쭙잖은 제갈공명 흉내를 내다가 대패하였고, ​개경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현종은 별수 없이 몽진길에 올랐고,
각지의 호족들에게 온갖 괄시와 천대를 받으며 나주까지 도망을 하였는데,
시련이라면 이골이 난 그도 이가 갈렸을 것이나, 질긴 명줄 하나는 타고난 팔자였다 .
친정을 한 거란의 성종은, 
원정 기간이 길어지면서, 양규 등 게릴라들의 기승에 보급선이 위협을 받게 되자,
진흙탕 속에 숨은 미꾸라지보다 잡기 어려운 현종을 포기하고, 고려의 형식적인 항복을 받은 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종으로서는 피난하는 동안 싸가지 없는 호족들에게 시달리느라 열불은 났었지만, 어찌되었건 죽지 않고 무사히 개경으로 복귀한 덕에,
영토를 한 뼘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조가 없는 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
조실부모하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기만 했을 뿐, 
왕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가 얼떨결에 왕이 된 후,
바로 전란을 만나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을 한 것밖에는 경험이 없는 그에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 노릇을 기대한 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친정 초반, 이기적이고도 탐욕스러우면서 노회하기까지 한 문신들의 술수에 놀아나는 바람에,
군인들의 봉급이랄 수 있는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을 위한 전시과로 돌려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문신들이 다 도망간 고려에서 피를 흘리며 거란과 싸웠던 무신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정변을 일으켰다. 고려 최초의 무신란이었다.
자칫 후대 무신정권 시기의 왕들처럼 허수아비 왕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위기였으나,
그러기엔 그동안 살아온 그의 인생이 녹녹치 않았다.
음모가 난무하는 험난한 강호생활을 견딘 그의 내공은, 간단한 술수로 김훈, 최질 등 무신  19명을 척살해 버렸고, 그 마무리 또한 깔끔하였다.
1015 년의 일이었다.

한편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거란 성종은 고려 내부의 혼란을 감지하고 재차 침입을 준비하였는데,
비록 전통의 대국이자 우방국인 송이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고려에 대한 지원을 거절하였으나,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현종은 내정을 다지고 군대를 확충하며 전쟁의 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018년 드디어 거란이 대규모로 침입해왔으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고려는 강동 6주를 근거로 북방을 굳건히 지켰고,
고려의 주력에 막힌 거란은,
우회하여 적 종심을 깊숙이 타격하는 유목민 특유의 상투적이나 위력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개경을 위협하였다.
강감찬은 이에 적의 후위를 공격하여 적의 보급선을 잘랐고,
현종은 철저한 청야전술 및 자신의 근위 병력까지 차출하는 기민한 대처로 개경을 지켜내었다.
죽으면 죽었지 또 한 번의 몽진은 못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소배압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고,
역사상  비자발적 철수를 해야 했던 군대들 대부분의 운명처럼, 길목을 지킨 강감찬의 고려군 주력을 만나 포위 섬멸되었다 .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그 이름도 찬란한 귀주 대첩이다 .
1019년의 일이었다.

귀주대첩 이후 동북아에는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고려에게 혼쭐이 난 거란은 송을 침략할 여력을 잃었고, 
거란 공포증이 있는 송은 현실 안주를 택하였으므로, 고려, 거란, 송의 삼국정립 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 주도의 국제 정세 및 평화는 고구려 장수왕기 이후 실로 오랜만에 출현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고려뿐만 아니라 대륙, 만주를 모두 아우르는 전쟁 없는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천하의 모든 생령들은 제 명을 누리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고려는 전성기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현종은 내정에도 업적이 많은데,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변에 나성을 축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고,
군마의 수를 늘리기 위해 감목양마법을 시행하는 한편,
어려운 나라 재정에도 불구하고 무관에 대한 대우를 높였으며,
24절기의 하나인 망종에 전몰자를 위한 국가제사를 시행하였다.
현대에도 망종을 현충일로 삼아 호국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개경을 확장하여  5부  35방  314리로 정비하였으며,
경기제를 실시하여 개경부 인근의 군현을 직접 다스렸고,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5도, 양계, 4도호부, 8목을 정비하였다.
향리의 명칭을 호장, 장으로 바꾸었고,
향리 자제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주현공거법을 실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높였다 .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권농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주창수렴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전몰자 유족의 생계를 위하여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면군급고법을 시행하여 노부모를 모시고 있은 자들의 군역을 면제하였다.
현화사를 건립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전면 부활하였으며,
초조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드는 등 유학 진흥에도 신경을 썼다.
거란의 침략 중 소실된 태조 ~목종까지의  7대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후대에게 영광스러운 조국을 남겨준 불세출의 명군 현종은,
1031년 40세를 일기로 정말 아까운 나이에 서거하여 22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슬하에 5남  8녀를 두었는데, 고려 전성기의 세 임금, 9 대 덕종, 10 대 정종 그리고  11 대 문종이 모두 그의 아들들이었다.

​ 하늘은 큰일을 맡기기 전에 엄청난 시련을 준다는 맹자의 말에 잘 어울리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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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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