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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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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11대 문종, 고려의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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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휘
김은부의 둘째 딸 원혜왕후의 소생이다.
원혜왕후는 언니와 함께 현종에게 시집갔으나, 결혼한 지 10여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만 비운의 여인이었다.
현종은 왕자를 둘씩이나 생산한 첫째 아내가 사망하자, 
아들을 더 낳고 싶은 욕심인지 아니면 남겨진 어린 자식들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시집 안 간 처제를 마저 입궁시켜 세 자매를 모두 취하는, 당시로는 일반적이었으나,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변태적인 남자의 로망을 실현하였는데,
김은부의 딸들은 이상하게도 명이 짧아 남편이 죽기 전에 모두 사망하였고,
현종마저도 그간의 고생이 무색하게 불과 40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들의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아버지의 팔자를 그대로 이어받게 되어,
정치 상황에 따라서는 아버지처럼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가련한 신세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당대에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의 전우들 중에는 별다른 야심가가 없었는지,
문종의 이복형들은 비록 상징적인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나, 각각 16, 17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초창기 로마 원로원처럼 모범적인 귀족정이 구현된 시기였던 셈인데,
당대 귀족들의 인품이나 식견이 다른 시대와 다르게 유달리 뛰어났던 덕분…은  아닐 것이고.
현종기 거란의 침입과 격퇴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고, 
이후 지속된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면서 유지 강화된 당시의 건강한 정치 문화가,
연속된 소년왕의 등극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었던 혼란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정종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에게 양위를 하였는데,
현대적 관점이라면 나라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당연한 조치로서 그렇게 안하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혈통을 중시하던 당시 왕가의 관행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는 남다른 형제애와,
핏덩이가 등극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한 정종의 우국충정이었을 수도 있고,
당시 고려의 주인 격이었던 문벌 귀족들의 의지였을 수도 있으나,
뭐가 되었건 고려의 정치적 환경이 절대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하겠다.

어려서 부터 활쏘기와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복형 정종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사령의 지위에 있었던 문종은 ​1046년, 28살이라는 딱 좋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리둥절한 얼굴로 귀족 할아버지들의 눈치만 살펴야 했던 이복 형들의
처지에 비하면,
남자로서 신체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고, 세상 물정에 대한 식견도 상당히 갖춘 나이에 즉위하여, ​
조정의 한 축으로 바로 기능할 수 있었던 문종은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화기의 특권층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죄의식 없이 전횡을 부리는 것이
일상이고,
고려도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이러한 독버섯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 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했으나,
왕권이 약했던 만큼, 이는 거란하고 전쟁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활력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발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으므로,
의식 있는 신왕의 시선이 이들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 첫 번째 회초리를 맞은 것은 윤경회였다 .

윤경회는 불경을 서로 돌려가며 읽는 의식으로 이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무릇 모든 행사에는 돈이 들고, 재원의 조달과 집행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기 쉬운 법인데,
당시에는 전국의 각 주, 부, 군, 현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윤경회를 성대하게 치르는 바람에,
이 행사는 비리의 온상이자 백성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문종은 윤경회 자체를 손대지는 않았지만 놀이화는 엄격히 금하였으며,
내친 김에 최 충에게 명하여 율령과 출판 그리고 결제 시스템을 손보게 하였다.
사치와 낭비로 백성들의 부담이 크니 근검절약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라는 것이었으니,
나무랄 데 없는 명분이요 적절한 조치였으나,
그건 고생하던 백성들의 입장이었을 뿐이고, 꿀단지를 뺏긴 쪽에서는 아무래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문종은 ​솔선수범하여 몸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이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정치가 뭔 지를 아는 양반이었다.​
이듬해에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모순된 율령들을 손보았으며,
사형수들은 세 번의 심사를 거치게 하는 삼복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정함을 추구하는 형벌 개념은, 나중에 죄수 심문시 3명의 형관을 입회하게 하는 삼원신수법을 낳았고, 고려를 선진적인 사법체계를 가진 나라로 만들었다.

​귀족들에게 견제구를 날림과 동시에 애민하는 왕으로서의 이미지까지 구축한 문종은은 역대 고려왕들의 숙원인 지방제도를 본격적으로 손보아,
기존 12 주,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 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했으며,
이후 4도호부 8목 56지주 56군사 18진장 20현령으로 다시 개편하여 지방 지배력을 높였다.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자연스레 왕의 권위를 높이는 전략은,
왕권 강화가 당면의 목표인 고려왕으로서는, 탁월한 수순이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역대 언제나 왕권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문벌 귀족들에게는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문종은 심기가 불편했을 이들을 달래기 위해,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하는 공음전시과를 시행하였는데,
공음전시과는 나중에 경정전시과로 개정되어 고려 멸망 시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관리들의 봉급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당근을 물린 문종은 본격적인 애민 정책을 실시하였다.
재면법과 답험손실법을 제정하여 천재지변 등으로 손실을 입은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주었고,
땅의 등급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전품제를 도입하여 농민들의 세부담을 현격하게 줄여주었다.
온 백성이 임금님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동안 왕들의 보호자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문벌 귀족들에게 은혜를 갚고,
백성들까지 어루만진 문종은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도 시동을 걸었다.

역대 한반도의 왕들이 귀족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방법은 불교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문종 또한 최충을 비롯한 문신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경 인근에 흥왕사를 창건하여 그 유구한 전통의 맥을 이었다.
절 하나 짓는다고 왕권이 강화되면 얼마나 될까 싶지만,
흥왕사는 경복궁만한 면적에 ​2800여 칸의 건물을 배치한 규모가 거의 왕궁 수준의 절이었고,
유사시 승병으로 돌변할 수 있는 상주인원만 수천 명, 거기에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싸기까지 하였으니,
비록 겉모습은 절이었으나 막강한 친위세력이 상주하는 개경인근의 거대 요새나 다름없었다.
문종은 금, 은을 시주하여 나중에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지는 화려한 금탑을 조성하게 하였는데,
이는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던 그의 국정 방침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했다 해도 과한 양이었다.
왜 그랬을까?
문종의 의도가 뭐였든,
압도적인 부의 상징인 금탑주위를 돌고 있는,
호국사상 및 왕즉불 사상으로 무장한 수천명의 중들에게 귀족들이 받는 압박감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의 출현이었다.​
이 요새의 첫 번째 주지는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었고,
의천은 교선 양종의 통합을 추진하여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문종은 불교만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일명 해동공자 최 충의 적극적인 협력 또한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성립된 최충의 9 재를 비롯한 사학 12도는 나중에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족벌이 판치던 고려사회에 학벌이라는 병폐를 추가하게 되지만 ,
뭐든 처음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으므로 문치의 시대를 이끄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종은 평화기에 소외되기 쉬운 무장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상장군의 직급을 6부의 상서보다 높게 배분하여 그들의 충성도 이끌어 내었다.
가히 조화와 균형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리도 빈번했던 자연재해도 뜸하였는지,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늘어나고, 백성들은 풍요로웠으며,
상업도 발달하여 개성에 이슬람 상인이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Korea가 만방에 알려진 시기였다.

빼어난 내치는 자연스레 국방력 강화로도 이어져,
철모르고 준동하는 여진 촌놈들은 매로 다스려 대국의 위엄을 보였으며,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압록강에서 깔짝대는 거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송과 단독으로 수교하여, 거란의 어쭙잖은 종주권 타령을 잠재웠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균형자로 등극한 ​것이다.
선대부터 내려온 투쟁의 종지부를 찍고 고구려 장수왕기에 버금가는 외교적 위상을 누렸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

​내, 외치를 가리지 않는 흠잡을 데 없는 왕의 통치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 사회는 아니므로 불만세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반란모의도 있었는데,
시대의 대세는 이들의 움직임을 모의에 불과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만들었고,
수년이 지나 사후 보고를 받게 된 문종은,
버르장머리 없는 주동자 거신만 죽여 버리고 나머지는 가볍게 처리하여,
법치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문종 치세의 부정적인 면으로 많이 회자되는 것은,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사학의 창궐, 외척 세력의
전횡 등인데,
태생적으로 호족 연합체 성격이 짙었던 고려는,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었기에,
광종을 제외한 왕들은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벗어나기 힘들었으므로,
이러한 고려의 한게를 고려하면, 문종은 모범적인 고려왕이었고 왕권도 강한 편이었다.​
사학은 사승을 만들고 그렇게 굳어진 관계는 학파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학문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다지 나쁠 것이 없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배타성이 강해,
국가적 위기 상황이 아닌 평화기에는, 임금의 명령보다는 제 스승의 뜻을 무겁게 여기고,
대국적 관점 보다는 자파의 이익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역대 의식 있는 왕들은 모두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는데,
거의 언제나 실패하였다.​
따라서 사학의 창궐은 고려를 배부르고 등 따습게 만든 문종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공자의 사설학원에서 출발한 유교의 속성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문종은 아버지처럼 세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아들여 경원 이씨를 강력한 외척 세력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세 자매가 모두 미인이었기 때문에 그랬을…..리는 없고, 
아버지처럼 취약한 왕권을 보완하기 위해 몰아주기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외척세력은 어느 왕조에서나 쓰기에 따라서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는데,
경원 이씨 세도의 첫 번째 주자인 이자연은 후대와 다르게,
최충과 더불어 문종의 든든한 국정 파트너이자 문치의 시대를 여는 주역으로서,
정권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7년간을 재위하며  고려의 황금기를 이룩한 문종,
그의 장수는 당시를 살아간 백성들의 홍복이었고,
고려가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따로 없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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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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