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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2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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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충헌의 시대, 20대 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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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탁
인종의 막내아들로 셋째 형 명종이 최충헌에게 밉보여 쫓겨나자,
요즘이야 한창 나이지만, 당시로는 곧 죽을 나이인 54세에 왕위에 올랐다.
평생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안했을 것이고, 형들 사는 것을 보면 그다지 부럽다는
느낌도 없었을 텐데,
운명은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인생을 슬슬 정리하기 시작해야 할 시기의 그를
태풍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 짓궂은 짓을 하였다.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형국인 최충헌은 퇴로가 없었으므로,
신종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뒤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들을 최선을 다해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명종 폐위 전에 이미 사원 세력을 비롯한 반대파들을 상당수 숙청했던 최충헌은,
신왕의 측근이 될 만한 자들을 모조리 쫓아내었고 환관들이 세력을 얻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왕은 식수원마저 최충헌이 지정하는 곳을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집권 초기 최충헌은 정변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종의 폐위 등 중요한 고비마다 강한 추진력을 보여 왔던 동생 충수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동생이라는 이유로 형보다 항상 낮은 지위에 만족해야 했던 충수는 그게 싫었는지,
태자의 장인이 되어 이러한 상황을 한 방에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멀쩡한 기존의 태자비를 쫓아내야 하는 일종의 무리수이긴 하였으나,
당시 그들의 힘이라면 못할 일도 아니었는데, 형의 생각은 달랐는지,
최충헌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했고, 결국 두 형제는 힘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각 1000여명씩 동원한 전투에서 패한 충수는 임진강 이남까지 쫒기다 추격군에게 피살되었고,
동생까지 죽여 거칠 것이 없어진 최충헌은, 장래의 위협요소들을 숙청하며 절대 권력을 향해
착실히 나아갔다.
최충헌이 이렇게 개경에서 절대자가 되어가는 동안,
고려는 칼끝에서 정권이 창출되는 중세의 특성과, 이의민이 뿌려 놓은 태생적 신분질서에 대한
거부감이 복합되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종 즉위 이듬해인 1198년 권력의 심장인 최충헌의 집안에서 신분 타파의 첫 깃발이 올랐는데,
사노라고는 하나 허드렛일 보다는 칼 들고 설치는 일에 주로 동원됐을 가능성이 높은 노비 만적은,
같은 처지의 공사노비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하였다.
그가 동지들에게 했다는 연설의 요지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 잃는 것은 노비 문적이요 얻을 것은 공경대부니라’였다.
근대적 평등 개념에 계급투쟁이론까지 가미된 선구적 인권선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거사 당일 모인 동지들의 수가 너무 적었고,
실행이 연기되는 바람에 불안을 이기지 못한 배신자까지 발생하여,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체포된 100여 명은 사람이 아닌 천노이므로 화형이나 참형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강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였고.
당시 밀고자인 순정에게 준 상금이 은 80냥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아,
최충헌에게 만적은 숭어를 따라 뛴 망둥이 정도로 인식되어,
물고기들의 배나 채워주고 말 정도의 해프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신분타파 운동으로서 그 의미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
후대 천민들의 정신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최충헌 일당들이야 뭐라고 생각했건,
다음 해에는 강릉과 경주 지역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정신없는 망둥이들이 한 둘이 아님을
보여 주었는데,
최충헌은 까짓 사람도 아닌 것들의 망동쯤은 아래 것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놔두고,
자신은 정적 제거와 자파 세력 강화에 몰두하였다.
이부상서에 이어 병부상서까지 겸임하면서 문무 관료들의 인사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 시기의 민란은 이의민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고,
13세기가 시작되는 신종 3년에는 밀양과 최충헌의 식읍인 진주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 동네에서는, 향리와 연관된 복잡한 사연 때문에 수천 명이 사망하였고 인근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이렇게 전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개경에서도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므로,
최충헌은 경대승처럼 사병집단으로 호위를 강화하고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막부의 시작이었다.

고려 역사상 최대의 권신이 된 그는 열심히 매관매직 및 정실 인사로 자파의 세력을 키웠는데,
경주에서 재차 반란이 일어나 신라부흥운동으로까지 발전하자, 토벌군을 파견하여 진압하였고,
개경의 노비들이 인근 산에서 전투연습을 하자, 모두 물고를 내어 개경 물고기들의 배를 채웠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었고.
이렇게 소란스러운 나라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던 신종은 1204년 등창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태자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재위는 7년.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

벽상삼한삼중대광 (정 1품) 개부의동삼사수태사(종 1품)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정 2품) 상장군(정 3품) 상주국(정 2품) 병부어사대판사(병부와 어사대의 장) 태자태사(태자의 스승)
신종이 희종에게 양위한 후 최충헌이 받은 관직명이라 한다.

당시에 기네스북이 없었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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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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