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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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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여몽전쟁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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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의 운명은 의종이 이의민에게 허리를 꺾이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이후 왕들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얼굴마담들로서 무신 집정의 칼에 죽지만 않으면 감사한
신세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도, 반란, 민란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왕조 말기의 혼돈 상황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언제 왕조가 교체 되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만 호족연합체의 성격이 짙은 고려의 특수성과 집권 무신 세력들 간의 격렬한 내부 쟁투가,
그나마 왕조가 숨쉴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최충헌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세력 내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잠재웠고, 무자비한 숙청으로 정권의
위협요소들을 제거하였으며,
강화된 권력을 바탕으로 왕의 교체를 마음대로 하는 등 고려의 실질적인 군주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왕처럼 권력을 아들 최 우에게 상속하였다.

최 우는 애비가 남겨준 기반을 더욱 공고히하고, 혼란에 지쳐버린 문신들을 포용하여 신질서를
구축하였고, 그 일환으로 자택에 제 2의 조정을 만들어 정사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대궐의 조정은 빈 껍질이 되었고, 왕의 존재 의미는 더욱 희미해졌으나,
반면, 실질적 조정을 이끌고 있는 최 우는 그 역할이나 위상에서 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별탈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최 우를 시조로 하는 새로운 왕조가 출현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지, 대권을 인수한지 6년 만에 몽골놈들이 침입하는 바람에,
왕조의 창업이라는 최 우의 찬란한 꿈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버리고,
외적에게는 비굴, 치사하고 자국 백성들에게는 잔악무도한 우리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차 침입 시,
마치 안시성주가 재림한 듯한 박서와 희대의 명장 김경손은 귀주성에서 북로군 1만의 발길을 잡았고, 개경도 만만찮은 저항을 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개경의 함락을 포기하고 흥왕사 등 개경 주변을 초토화하였으며, 전장을 충주 등
전국으로 확대하였는데,
고려 조정은 재추회의를 열어 항복을 결의하고 박 서에게 항복을 명령하였다.
이는 최 우가 현실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고심끝에 내린 합리적인 결정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 후의 행적으로 보아 그 보다는 아마도,
안북성에서 중앙군이 소멸된 마당에, 사나운 몽골군을 금쪽같은 지 사병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싫었을 것이다.
금나라를 공격하기에도 빠듯한 전력이었던 오고타이는 이를 냉큼 받아들였고,
침략군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챙기고, 일종의 총독인 다루가치까지 남긴 후 금의환향하였다.
꼴랑 3만으로 그만큼 챙겼으니 흐뭇하였을 것이다.
당시 충주 유씨를 비롯한 거대 호족들은 항복에 반대했다고 하는데,
만일 이때 고려 조정이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처럼 전국에 왕조의 위기를 알리며 봉기를 호소하는 한편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등 총력투쟁을
전개했더라면,
당시 국제 정세나 몽골 내부의 사정 등으로 보아 베트남보다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왕이 아닌 단순 독재자에 불과했던 최 우는 전국적인 봉기의 구심점이 되기 힘들었고, 민심 또한
그 동안의 폭정으로 이반되어 있었기에,
최 우를 비롯한 당시 정권 담당자들은 추진 동력을 얻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 우는 승리하기도 힘들고, 요행히 승리한다 해도 자기 울타리가 무너질 것이 확실한
개경에서 어정대기보다는, 세력을 보전하기에 보다 안전한 강화도로 보따리를 쌌고,
얼굴마담에서 방패막이로 역할이 바뀐 고종은 포로 아닌 포로가 되어 끌려가야 했다.

강화도 천도는,
독재자 최우의 입장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희석시킬 수 있고, 잠복해 있던 반대세력들을 노출시켜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이며, 지방 세력들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확보, 유지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었는데,
인간의 본성인란게,
국가와 민족의 안위보다는 개인의 안전과 복리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러한 최 우의 결정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고 수치스러워, 후손된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에 웅크린 최우는 왕의 입조를 제외한 몽골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주었으며,
마치 친원파 처럼 몽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으므로,
본토에 남겨진 지방호족세력들은 중앙의 도움 없이 알아서 저항을 하거나 항복해야 했는데,
문제는 몽골군의 성격이었다.
몽골은 금이나 남송을 치러가는 길에 덤으로 고려까지 건들인 것이므로,
최대 3만을 넘지 않는 소규모의 군대였으며,
1차 침입시를 제외하면 다루가치조차 남겨놓지 않는, 점령군이 아닌 순수 약탈군이었다.
따라서 만일 무서워서 항복을 하게 되면,
몽골군이 철수한 후엔 최 우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아 홍복원이 꼴이 나기 쉬웠다.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중소 지방세력은 아예 보따리를 싸서 심산유곡으로 숨어들거나,
외딴 섬으로 피신을 하여 자체 청야작전을 실시하였고,
충주 유씨처럼 무력이 좀 되는 거대 호족 세력들은 산성에 의지해 눈물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렇게 본토의 지방 호족세력들이 소멸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최우가 즐거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몽골군이 물러나면 방호별감 등을 파견하여 그 동안 못 받았던 세금을 걷고, 항복했던 놈들은
도륙하였으며,
서경처럼 반골기질이 강하고 침입 때마다 항복하는 지역은 주민들을 아예 소개시켜 폐허로 만들었다.

또한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약 2만 정도의 병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도에 대해 적극적인 점령을 시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군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도 최 우는 안북성 패배로 중앙군이 궤멸된 후, 중앙군 역할을 해야 했던 삼별초를 비롯한
강화도 병력들을 전쟁에 거의 투입하지 않았고, 전국단위의 의용군 모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최 우의 반민중적인 작태는 민심의 이반을 가속시켜,
오히려 몽골군을 환영하고 그들의 통치를 원하게 만드는 이적 행위로 귀결되었다.

여몽전쟁은 1231년부터 1257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27년 2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간헐적인 휴식기를 뺀다하더라도 11년이 넘는 전쟁이었다.
나름 처절하게 저항한 모양새이기는 하나,
이 기간동안 인구의 1/3이 사라졌고, 물적 손실은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결국은 항복하여 몽골의
반식민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참혹한 결과는,
주력도 아닌 소수의 별동대를 맞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제 일신상의 안위만을 위하여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싸우지도 않으면서도 완전 항복만은 하지 않아, 전국토가 유린되는 것을 유도, 방치한 최 우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나,
그 이전에,
당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거란 궁기병을 맞이해서도, 수십만씩 동원하며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정규군
조직을 거의 해체하고,
자신의 사병 조직만을 키운 그의 애비 최충헌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아무런 명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을 위하여 왕을 무력화시키고 나라를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갔던 역대 무신 정권의 담당자들도 그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보신만을 위해 나라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역대 최악의 난신적자 최 우,
그의 가문 우봉 최씨는 최 우의 손자 최 의가 살해 될 때 거의 멸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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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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