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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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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24대 원종, 몽골의 속국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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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정
평생 최가들에게 시달렸으면서도 오래 오래 살았던 고종의 맏아들인데,
어려서부터 영특 총명하고 기상이 활달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런게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아무튼, 나이 40에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적국에 항복하러 길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팔자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니 이어 몽골 두목 몽케도 죽어버리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청부자와 타겟이 동시에 사라진 것인데,
이런 경우, 일반적인 청부라면 흐뭇하게 휴가를 즐기면 되었겠지만,
조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그럴 수는 없고, 다음 타겟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점입가경으로, 몽골 놈들이 쿠릴타이를 양쪽에서 열더니 각각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를 두목으로 선출하는 더 황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몽골에 내분이 생긴 것이다.
이때 만일 고려가 전기처럼 정상적으로 기능을하는 국가였다면,
이러한 첩보를 입수하자 마자 귀국하여, 곧 다음 대를 이어갈 태자로서 문무신료들을 모아 놓고, 어찌하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동안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겠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미 국가라고 할 수 없는 고려에서, 왕이라고 할 수 없는 왕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가련한 태자는 신분에 걸맞는 정략, 군략 대신에, 투전판의 시정잡배들처럼 고려의 운명을 걸고 어느 놈이 다음 대 몽골 두목이 될 지 찍어야 했다.
그런데 열성조의 도우심인지 아니면 원래 도박에 소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특하게도 수도에 있는 아리크부카를 패스해서 카이펑에 있는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대권 계승의 명분에서 밀리던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가 자기에게 항복하러 온 것을 보고 감격하여 마치 동맹을 대하듯,
후대에 매국적 입성론을 막은 원종의 최대 업적이라고 불리는 불토개풍 즉 세조구제를 약속해 주고, 원종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였으며,
나중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고려로 시집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치욕스러운 항복이므로,
누가 시집을 왔는지 갔는지, 쿠빌라이가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따위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다만, 세조구제가 고려 정체성 유지의 일등공신이자 대단한 특혜라고 대대손손 원종에 대한 칭송이 마르지 않으므로, 이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길래 그 고고한 유학자들까지 칭찬 일색인지,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 첫번째 조항에,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바꾸지 말고 그냥 고려의 풍속에 따라 하던대로 하라’ 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 항은 그냥 일반적인 항복조항이다.
액면만 보면, 이게 뭔 특혜인가 싶기도 하고,
실제로 쿠빌라이가 고려에 대해 취한 조치도 말 그대로 의관만 그대로 두었지 그 동안 사용하던 명칭들을 모두 격하하였는데,
이에 따라 본인을 지칭하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명령을 담은 글인 “선지”는 “왕지”로 바뀌었으며,
충렬왕 때부터는 각종 관청과 관직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다.
제사제도 또한 바뀌어 원종 이후의 왕들은 묘호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시호의 앞 글자에도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자를 넣어야 하였다.
이는 쿠빌라이가 고려의 항복에 감격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기특하게 생각하여 약간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남송처럼 나라 자체가 사라져 백성들은 물론 왕경 귀족 전부가 천민이 되지는 않았으나,
자주국이 아닌 원의 변방을 지키는 번견으로서, 달라면 주고, 보내라면 보내고, 바치라면 바쳐야 하는 신세를 면하지는 못하였으므로,
원의 요구를 감당해야 했던 고려 백성들의 처지는 남송의 백성들과 도긴개긴이었는데,
그러나 왕의 입장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100년 동안 아무 실권이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허리가 꺾이기도 하였는데, 까짓 호칭이 무슨
대수였을까?
황제의 말만 잘들으면 저 조폭같은 무신 놈들을 확실하게 때려잡을 수 있고, 호칭이야 무엇이든
국내의 권력도 차지 할 수 있으므로,
원종으로서는, 쿠빌라이가 28년 동안 조국을 초토화시키고 전체 인구의 1/3을 없애버린 철천지
원수의 수장이 아니라,
오히려 잃었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형적인 고려의 정치 지형을 정상화시켜 주는 은인으로
보였….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원종은 쿠빌라이의 은혜에 감복하며 기꺼이 지시에 따랐다.
따라서 이 조항은 왕과 그 주위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을 뿐,
일반 백성들은 물론 고려 전체로 보아도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개혁 추진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후기에 고려는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의 감소로 인하여, 국가의 세수가 감소하고 유민이 넘쳐 나는 등 사회문제가 심각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직접 관료를 파견하여, 만화의 근원인 노비제를 손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사정 따위보다는 언제나 자파의 세력 보존과 확대가 최우선인 당시의 권문세족들이, 세조구제를 명분으로 전통적인 노비제를 건드리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개혁이 좌절되는 기막힌 일이 있었다.
이미 국가기관의 수와 기능이 축소되고 명칭도 다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부마국으로서 대대로 몽골 공주를 비로 맞이하여, 왕실에 왕건 유전자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된 고려에서,
다른건 다 바꿔도 노비제만은 세조의 유훈이라 못 바꾼다는 고려 기득권들의 이 어처구니 없는 논리는,
고려 정체성 유지의 일등공신이라는 세조구제의 허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원종은 1260년 고종의 뒤를 이었는데,
비록 몽골에서는 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으며 국왕으로 책봉까지 받았으나,
국내의 위치는 여전히 얼굴마담이자 방패막이로서 무신 집정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한심한 신세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므로,
노비 출신 집정 김 준을, 무슨 대단한 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떡하니 최고급 공신인 벽상공신으로 올리고 다시 뒷전으로 물러 앉았다.
그러나 대처에 나가 큰 판에서 놀아본 원종은, 정쟁의 대가 쿠빌라이에게 한 수 배웠…..는 지는
모르겠으나,
무신집정의 한계를 드러내며, 우물 안 개구리 마냥 되지도 않는 대몽항쟁의 지속을 주장하는 김 준을, 내부 알력을 이용한 차도살인지계로 제거하였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어리석은 무부놈 때문에 만백성이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여 그리한 것…..은 아닐 것이고,
김 준을 그냥 두었다가 쿠빌라이의 심기라도 건드리게 되면 그 알량한 제후왕 자리마저 날라갈까 보아 그랬을 것이다.

1268년 임 연과 공모하여 김 준을 죽여버린 원종은,
바로 친정을 실시하여 그 동안 고귀한 왕을 능멸하고 백성들을 학대한, 이 천인공노할 무부놈들을 단매에 때려 죽이고 선정을 베풀…… 지는 못하고,
그냥 지 양아버지를 패죽인 임 연을 새로운 집정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임 연은, 자기도 무신 집정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김 준처럼 철저한 대몽항쟁을
주장하였는데,
이래서야 고차원적인 스킬을 사용해가며 김 준을 제거한 보람이 없기에,
원종은 몽골의 출륙환도 요구를 명분으로,
1269년 태자 심을 몽골에 입조하게 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과 입장이 다른 임 연은 이에 결사반대하였는데, 그래도 원종이 고집을 부리자,
마치 최 우처럼 왕의 측근들을 도륙하였으며, 야별초를 동원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영종)을 왕위에 올렸다.
임 연이야 보고 듣고 배운대로 선배들 흉내를 낸 것이었겠지만,
그러나 시대는 이미 이러한 무단 통치가 통할 시대가 아니었다.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한 쿠빌라이는 당장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요절내겠다고 임 연을 협박하였고, 이 무시무시한 협박에 바짝 쫄은 임연은 원종을 부랴부랴 다시 복위시켰는데,
그렇다고 입조하여 해명하라는 쿠빌라이의 명에 따라 원종과 함께 입조했다가는, 목이 따로 높은데 걸릴 게 분명하였으므로,
원종을 홀로 입조시키는 한편, 야별초를 내륙 각지에 파견하여 육지의 인원과 물자를 섬으로 대피시키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당랑거철인지는 지도 알았을 것이므로,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얼마 후 등창으로 죽어 버렸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뒤를 이어 아버지의 유업을 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몽골에 입조한 원종은 세자 심의 국혼을 추진하였고,
다시 귀국한 후에는,
강화도로 돌아가 봐야 도로 무신놈들의 포로 겸 꼭두각시가 될게 뻔하였으므로,
개경에 머물며 진짜 왕처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래서 최가들이 다른 것은 다 몽골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도 왕의 입조만은 악착같이 막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최가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아무튼 강화도의 조정은 무시무시한 몽골을 등에 업은 왕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으나,
집정 임유무는, 남들이 간다고 어떨결에 따라갔다가는 정권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위험하였기에, 지 애비처럼 이를 거부하고 대몽항쟁의 지속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 연도 아닌 그의 아들 따위는 이미 원종의 상대가 아니었다.
원종은,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른 차도살인지계를 또 사용하여 임유무를 죽여버림으로서,
개경환도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며, 무려 100년 만에 무신 시대를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
원종은 ‘이 얼마나 조상님들께 자랑스럽고 자신에게 떳떳한가’라고, 스스로 기꺼워했…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일국의 집정을, 실력을 키워 당당하게, 왕명으로 절차를 밟아 처벌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조폭처럼 자파의 세력을 동원하여 토벌한 것도 아니라,
철전지 원수 몽골의 힘을 이용하여 궁지에 빠뜨렸고, 이에 대해 반발하자 암수를 사용하여 제거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반발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임유무가 죽고 조정의 중신들이 개경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삼별초배중손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는데,
기존 병력들의 이탈이 심해지자 이대로 강화도를 지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김 준이 준비해둔 대몽항전기지 진도로 탈출하였다.
초기에는,
서남해 운송의 요충인 진도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남해안을 포함한 거대 해상세력을 형성하였고, 나주와 전주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몽골놈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렸으며,
결국 김방경을 필두로 한 여몽연합군에게 진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삼별초는, 치열했던 이 진도 공방전에서 배중손 등의 지휘부가 사망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사라졌으므로, 사실상 여기서 망한 것이었으나,
이렇게 끝내기에는 그 동안 최고 권력자의 주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던 삼별초의 내공이 간단하지 않았다.
근성의 삼별초는 포기하지 않고 잔당을 모아 제주도로 이동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시대의 대세는 이들의 분투인지 발악인지 모를 저항을 가볍게 분쇄하였고,
결국 최후의 농성을 하던 김통정을 자살로 몰고가 삼별초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삼별초를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민족혼의 화신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삼별초의 난을, 대제국 몽골의 엄청난 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보여준 쾌거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으나,
사실 삼별초는 고려의 중앙군을 무너뜨린 최가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양성한 사병집단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친위대 역할을 한, 철저히 반민중적인 조직이었고,
삼별초의 난은, 그 동안의 패악질로 갈 데가 없어진 잔당들이 발악적으로 일으킨 반란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하는 짓도 그냥 대규모 해적질이었다.
다만 봉기할 때,
병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강화도의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며,
노비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하였기에 노비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삼별초에 가담하려는 노비들이 줄을 이었으며,
삼별초의 본거지까지 갈 수 없는 노비들은 동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므로,
삼별초의 난은 그 반란의 동기나 명분과 관계없이, 노비들의 신분 상승 욕구에서 반란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혼이니 저항정신이니는 다 하품나는 소리이고,
그나마 의미를 찾는다면 신분 해방을 위한 노비들의 눈물겨운 투쟁 정도일 것이다.

한 편, 서경의 최 탄은 1269년 임 연이 원종을 폐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최 탄은, 천하에 패역한 역신 임 연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군사를 휘몰아 강화도로 진격하 ….기는 고사하고,
무고한 주변 고을과 여러 성의 관리들을 학살한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마치 제 것인양 통채로 원나라에 바쳐 버렸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놈은, 원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면서도,
원종이 복귀만 한 게 아니라, 무신 정권을 끝장내고 왕정을 복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려로 돌아오기는 커녕,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토벌군을 막아달라고 애원하였는데,
원종에게 감격했었다는 쿠빌라이는 이 고려의 반역자에게 냉큼 호응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 탄을 그 책임자인 총관으로 임명하여, 감히 어느 누구도 이놈에게손을 못대게 하였다.
한편, 쿠빌라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던 원종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가 팔아먹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버린 서북면이 너무 아까웠는지,
공적 사적 연줄을 총동원하여 쿠빌라이에게 서북면을 돌려달라고 여러번 호소하였으나,
그렇게 친하다던 쿠빌라이는 그럴 때마다 택도 없는 소리 말라며 일축하였다고 한다.
결국 원종은 죽을 때까지 서북면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원종이 삼별초 때문에 고생을 하든 서북면이 아까워서 복통에 시달리든,
대주주 쿠빌라이는 고려에 일본원정을 위한 전비를 부담하게 하는가 하면, 치사하게 여자까지 보내라고 명령하였는데,
전문경영인으로 전락한 원종은 이에 대해 항의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삼별초의 방해 속에서도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느라 허리가 휘어야 했으며,
고려판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한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만백성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원종은 1274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쿠빌라이가 아직 시비를 걸지 않았는지, 황제의 예로 장사지내고 종묘에 모실 수 있었으므로,
묘호를 부여받은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는 행운도 챙길 수 있었다.
다음대 충렬왕부터는 오리지날 제후 대접을 받았기에 묘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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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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