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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2월 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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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 견훤(1), 난세를 열고 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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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년(경문왕 7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자연재해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시기였으나, 아버지가 부농이었기에,
계모와 그 자식들에게 구박은 좀 받았어도 배는 곯지 않았는지, 체격이 남달리 컸다고 한다.
젊은 견훤은 능력 있고 반항적인 젊은이답게, 찌질하게 집안 재산을 놓고 동생들과 툭탁거리는 대신,
대처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였다.
별 연고도 없이 상경한 몸 좋은 젊은이는 자연스레 군문으로 향했고, 곧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의 남 다른 기상은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웠던 진성여왕기에 더욱 빛을 발하여 비장으로 승진하였다.
비장은 장군 예하의 부장쯤이므로, 그의 형편없는 골품으로는 거의 최고위직에 가까웠을 것이다.

무역의 요충지,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들과 반항적인 호족들을 때려잡으라는 명을 받고,
서남해 방수가 되어 경주를 떠났는데,
경주를 떠날 때 데리고 간 병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신라 사정 상 많은 병사를 배정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남해에서 근무할 때는 창을 베게 삼아 잤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성실성과 용감성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이르는 곳 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따르는 무리가 무려 5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넣은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년), 마침내 몸을 일으켜 무진주(전남 광주)를 공취하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아자개도 이 시기에 세력을 일으켰는데, 이에 자극받아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전주)에 무혈 입성한 후 도읍을 옮겼고,
의자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백제왕을 칭하였다. 중국에 사신도 보냈고.
이듬해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대신 아직 복속하지 않은 나주 남쪽의 연해변을
공격하였다.

양길의 수하에 있던 궁예가 마침내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우자,
배신당한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리고 회유하였으나,
형식적으로나마 복속했던 양길은 궁예에게 허무하게 패하여, 천하 대신 궁예라는 호적수만을 남겨주고 죽었다.
양길을 꺾은 궁예는 실력을 갈고 닦아 903년 나주로 향하였고,
견훤에게 반항적이었던 호족들의 협조를 받아 견훤의 턱 밑에 비수를 들이 밀었다.
인후와 같이 중요한 나주를 잃은 견훤은 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영 신통치가 않았고, 909년, 다시 나타난 궁예의 부하 왕건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그래도 미련을 못버리고 910년, 나주를 10일간 포위 공격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고 912년에는 덕진포 싸움에서 친히 군사를 이끈 궁예에게 패하였다.
참으로 사나운 중이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안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주에서 이렇게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나주의 호족들이 적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되는 게 없다.

918년,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피살되었고 드디어 난세 종결자 고려가 개국하였다.
견훤은 호적수 궁예의 퇴장을 반기고 왕건과 화친하였는데,
아마도 고려를 평화롭게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나, 오산이었다.
왕건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궁예의 세력을 포섭하였고,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마저 복속시켜 버린 것이다

아자개.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농부에서 한 지역의 패자로까지 성장한 것을 보면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임에는 틀림없고,
자식들도 딸을 포함해서 모두 출중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견훤의 세력이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합칠 생각을 하지 않고 왕건에게 복속하였다.

아버지가 뭔 짓을 하건,
왕건과 화친하는 동안 힘을 기른 견훤은 920년 1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야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는 첫 공격 이후 무려 19년 만에 숙원을 이룬 것으로, 신라의 목숨줄을 끊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 고무된 견훤은 내친 김에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는 왕건에게 SOS를 날렸고,
견훤에게 신라를 통채로 줄 수 없었던 왕건은 즉각 구원에 나섰는데,
견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여기에서 왕건과 피튀기며 싸워봐야 별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물러나 왕건의 반대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공주로 진출하였다.

924년 7월, 아들 신검에게 조물성 (김천)을 치도록 하였으나 실패했고,
고려와 화친하였다.
이듬해에는 친히 기병 3천으로 조물성을 공략하였으나,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나섰기에
결국 화의하였는데,
화의의 조건으로 서로 볼모 교환하기로 하여,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 진호를 인질로 보냈고 왕건은 사촌동생 왕신을 인질로 보내었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되어 진호가 죽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견훤이 고려의 책임을 물어 왕신을 죽여 버리는 바람에 화의는 깨져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건이 열 받아 분노의 공격을 퍼부었고 대야성을 빼앗아버렸다.
고려의 공격 강도가 심상치 않자,
견훤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여,
신라의 근품성을 빼았고 영천을 습격하였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군사를 돌려 서라벌로 진군하였다.
자기 목숨 줄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두 맹수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신라는 돌연한 공격에 화들짝
놀라 고려에 구원요청을 하였고,
이에 왕건은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궁성을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후 자살하게 하고, 김 부를 옥좌에 앉혔으며,
왕궁을 약탈하여 진귀한 보물들과 병장기를 빼앗았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 및 귀족 자제들과 실력 있는 장인들을 끌고 떠나버렸다.
열받은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백제군의 후미를 급습하기 위해 정예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구 팔공산으로 향했으나,
백전노장 견훤의 역 매복 작전에 걸려 참패하였고, 왕건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산 전투이다.
견훤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그 영역을 오늘날의 충북, 경북 일대에까지 넓혔고, 왕건에게 빼앗겼던
나주도 20년 만에 탈환하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최강자가 되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2세.
견훤은 이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 늦게 인생의 절정을 맞은 견훤은 경상도에서 고려의 세력을 완전히 지우기로 마음먹고,
929년 3천 명의 고려군이 주둔해있는 고창(안동)을 포위하였다.
분위기상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으나,
고려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견훤의 서라벌 만행에 분노한 안동 호족 삼태사가 있었다.
양측은 고창의 병산에서 맞붙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고창 토착세력의 고려 지원과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밀려,
8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으며 참패하였고, 고창 일대의 신라 30개 군현이 일제히 고려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고창전투의 여파는 생각보다 더 대단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나주도 다시 고려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후백제에 속했던 일부 호족들의 이탈도 시작되었다.
이 꼴을 본 견훤은 심기일전하여 수군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는데,
수군력의 우위를 자부하던 왕건의 방심을 이용한 이 전략은 멋들어지게 성공하여,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천여 척을 불 태우고 300여 필의 군마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렇게 서로 펀치를 한 번씩 주고받은 후,
견훤은 934년,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운주에서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천적 유금필에게 유린당하며, 2/3의 병력을 잃고 측근 장수들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 후, 천하 쟁패의 추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연안의 110여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화되었다.

마치 결승전 같았던 운주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늙은 견훤은 후사를 생각하였고,
자수성가한 노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기준에 맞는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아버지 눈에는 안 찼어도, 나름의 헌신을 했던 맏아들 신검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무산되었고,
결국 금산사에 억류되고 말았다. 금강은 살해되고.
이 분통터지는 일들은 자부심 강한 늙은 아버지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젊은 시절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자기 아버지가 한 것처럼, 왕건에게 의탁해 버렸다.
아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 것이다. 특히 난세에는.
왕건은 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환대하였고,
맛있게 요리하여 신검을 꺾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 하였다.
견훤은 후백제가 망한지 겨우 며칠 만에 황산 근처의 사찰에서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향년 70세, 936년의 일이었다.

상주 촌구석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상경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비장의 자리에 올랐고,
서남해로 발령을 받은 후, 해적들을 비롯한 각종 도적, 호족들을 제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천년 신라의 심장을 유린하고 고려를 몰아붙여 한반도 최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창업국가들처럼 후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고, 결국 주적 왕건에게 투항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손수 무너뜨렸다.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영욕이 교차한 인생이었다.

한나라의 창업주답게 탄생설화가 존재하는데, 그는 기둥만한 지렁이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지네설화의 변종인데,
지네설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설화로서, 아마도 견훤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그 외에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는 설화도 있는데, 이는 그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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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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