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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2월 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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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유 금필, 상승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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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주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역사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상승장군으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대군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따버리는 여포 같은 장수였다.
일기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태조의 치세 초반에 서경을 확보하는 등 북방을 개척하여,
발해유민의 유입의 발판이자 통로가 되게 하였는데,
이때 여진족 추장들을 능란하게 다루어 대 추장으로 불릴 정도였고, 
북방이 안정된 후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여 옥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전투가 끝나자 마자 태조와 견훤이 직접 겨루는 조물성으로 이동하여 불리한 전황을 바로 뒤집었다.
견훤은 유 금필이 도착하였다는 말만 듣고도 전의를 상실하여 화친했다고 한다.

태조는 공산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장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하여 쫒기게 되었는데,
축성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유금필은 이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신속하게 이동하여 후백제군을 패퇴시키고 태조를 구원하였으며,
고창 전투에서는 지방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3천여의 군사로 후백제군 8천 여를 살육하기도 하였다.
고창 전투의 승리는 고려가 다시 전장의 주도권 잡게되는 획기적인 전공이었으나, 
호사다마였는지 당시 고려 조정의 주류였던 패서계의 견제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살이 중에도 왕을 원망하지 않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견훤이 고창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수군으로 공격을 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의 수군을 격퇴하였고, 그 공으로 복직되었다.
후백제가 개경을 공격한 후 여세를 몰아 6년 만에 서라벌로 진군하자 태조는 다급하게 유금필에게 구원을 명하였는데, 
군사를 모을 시간이 없자 단지 80 여명의 결사대만을 조직하여 출발하였고, 
신검의 대군과 조우한 유금필은, 이 소수의 군대로 돌격하여 패퇴시킨 후 서라벌에 입성하였다.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신검군과 맞붙었으나,
이번엔 아예 박살을 내고 적장 일곱을 사로잡아 버렸다.
이런 어벤져스급 활약에 태조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운주전투에서도 직접 선봉에 서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수뇌부를 사로잡았다.
견훤에게 빼앗겼던 나주를 재탈환한 것도,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을 맞이한 것도 유금필이었고,
통일전쟁의 대미라 할 수 있는 일리천 전투에도 말갈병을 이끌고 참가하여 승리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941년, 승리의 영광으로 점철된 인생을 마쳤다.

태조의 에이스로서 무패의 전적을 자랑한다.
태조가 고비를 맞을 때마다 바람같이 나타나 구원하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이겼으며, 중요한 싸움에서는 더 크게 이겼다.
가히 고려의 가르친링이라 할만하다.
무용만 높은 것이 아니라 충성심도 대단하여 태조의 오른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태조가 누린 여러 가지 복중에서도 큰 복이었다.
태조는 유금필의 딸를 제 9비로 맞이하였고,
유금필의 자손은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문제 삼지 말고 중용하라는 유시를 남겼다고 한다.

유 금필, 척 준경, 이 의민, 이 성계…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고려 맹장의 계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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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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