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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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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태조 왕건(1), 난세 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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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의 해상 호족 왕륭의 맏아들이었다.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탄생설화가 존재하는데,
태양이 겁탈하고, 지렁이가 덮치고 하는 이상 망측한 것이 아니라 좀 학술적이다. 과학적이지는 않다.
풍수의 대가 도선 대사가 집터를 잡아주었는데,
이사한 후 어머니 한 씨에게 태기가 있었고, 터가 좋았는지, 돈이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사히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였더란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는데,
이 괴상한 빛이 갓난아기의 시각 발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총명과 슬기가 남달랐고, 용모도 훤칠한게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17살 부터는 남의 집터나 잡아주고 다니던 석학 도선대사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배웠다. 그는 당대의 엄친아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과 배경을 골고루 갖춘 이 아름다운 청년은,
약관의 나이에 당대의 영웅 궁예의 휘하에 들게 되었고, 명성과 기대에 걸맞게 맹활약하였다.
궁예의 수족이 되어 전쟁을 수행할 때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하여 궁예의 세력이 한반도 중부까지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가문의 전공을 살려 후백제와 해상에서 대립하였다.
903년에는 궁예의 뜻을 받들어 나주를 점령하였으며, 견훤의 근거지인 전라북도까지 공격하였다.
이 패기 넘치는 멋진 청년은 나주 공략전을 수행하면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며 버들잎을 띄워주는 방년 17세, 오씨 성의 어여쁜 아가씨에게 애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나주 점령 이후에도 경상도와 전라도 곳곳에서 싸워 승리하였고, 
913년, 마침내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왕건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시중이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다른 세력들의 견제와 더불어, 왕권강화에 혈안이 되어있던 궁예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궁예의 충성 시험은 최 응의 기지로 어찌어찌 넘겼으나,
언제 다시 숙청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같은 고민에 빠져있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권유와,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신혜왕후 유씨의 격려에 힘입어 한밤중에 궁궐의 담을 넘었다.
궁예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꼴 사납게 철원을 탈출하였고,
토끼몰이를 당하다 객사하여, 자신의 관심법이라는 신통력이 뻥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918년 42살의 나이에, 궁예를 제거하고 왕 자리를 꿰찬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련도 시작되었다.
쿠데타 성공 4일 만에 첫 반란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청주 출신들의 연속적인 역모에 시달렸으며, 철원 주민들의 적대적인 시선 속에 좌불안석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왕이고 뭐고 일단 살아야겠기에 본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장가를 많이 갔다.
그러나 궁예가 남긴 그림자는 깊고도 넓어서,
웅주(공주) 이흔암과 명주(강릉) 김순식의 반발과 항거라는, 참으로 두려운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청주 출신들의 역모와는 다르게,
이흔암은 공주성이 후백제로 귀순하는 것도 방치한 채 상경하여 은밀히 세력을 모았는데,
이러한 교묘한 항거 덕분에,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고, 
비밀경찰 조직을 운용해서야 겨우 때려잡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견훤의 아비인 상주의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하였다는데,
다 늙은 영감이 무슨 영화를 바라겠다고 아들 가슴에 못을 박나 그래..
이흔암을 제거하는 것도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었으나, 진정한 골칫거리는 명주였다.
김순식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다른 호족들과는 달리, 
궁예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로서 진정한 동맹이었고, 영원한 후원자이자 창업 동지였으므로,
궁예를 살해한 왕건에게 진심으로 분노하였다.
김순식의 개인적인 분노야 그렇다지만,
문제는 김순식이 도사리고 있는 명주의 지정학 위치와 그의 군사력이었는데,
견훤에게 나주만큼이나, 명주는 고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역이었고,
군사력 또한, 전통적으로 영동지방의 중심지였던 명주답게 지역의 맹주급이으므로,
만일 김순식이 궁예의 복수를 명분으로 봉기하여,
견훤과 연계를 맺고 철원 방면에서 공격을 가했다면, 고려는 시작하자마자 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왕건이 안팎으로 불안하던 시기는,
반대로 견훤에게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나,
그 동안 사나운 중에게 시달리느라 지쳐버린 견훤은,
그저 궁예의 몰락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는지, 
왕건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 간의 교류를 추진하는 등 뻘 짓을 하였다.
자기 딴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고,
중국, 일본 등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고,
천하도 손 쉽게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나, 만고의 지 생각이었다.
당대의 기린아 왕건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920년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후백제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옛날 삼국시대에 당나라에 한 것처럼,
고려를 향해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었고, 경상도 북부 지역의 신라 호족들 또한 후백제가 아니라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견훤이 피를 흘려가며 겨우 얻는 것을 왕건은 그냥 줍는 꼴인데,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내부를 안정시키고 힘을 비축한 왕건은 925년 조물성으로 출정하여 후백제군을 축출하면서, 견훤과 본격적인 쟁패에 돌입하려고 하였는데,
막상 붙어보니 서로의 힘이 비등하여 일단 물러섰다.
견훤도 ,왕건이 궁예만은 못해도 제법 만만치 않은 적수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화의하였는데,
견훤은 아내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 동생 왕신을 후백제에 보내었다.
왕건 입장에서는 이 시기부터 발해의 유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견훤은 견훤대로 기왕 대야성을 점령한 김에 신라를 마음껏 두들기고 싶었을 것이다. 
후방의 나주도 걱정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당분간 제 갈 길을 가려고 하였는데,
불과 6개월 만에 송악에 있던 진호가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죽였다고 펄펄 뛰면서, 왕신을 죽여 버리고 기세등등하게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다시 맞붙은 왕건은 예전의 왕건이 아니었다.
견훤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던 왕건의 군사력은,
925년 9월부터 본격화 된, 발해 유민의 유입으로 이미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있었던 것이다.
300년이나 지난 일이라 좀 어색하긴 하지만,
평양을 보유하고 있는지라,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할 수 있었던 고려는,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랄 수 있는 발해가 허무하게 멸망한 후, 
나라야 망하든 말든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다가,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발해의 귀족들이나 무사들에게 안성맞춤의 도피처가 되어 주었고,
발해에 있을 때부터 전쟁이 주 업무였던 이 유민들은 왕건의 즉시 전력이 되어, 부족한 군사력을 보강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왕건으로서는 횡재를 한 셈이었다.

전력이 크게 보강된 왕건은 왕신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터뜨렸다.
왕건은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심상치 않은 기세를 드러내었는데,
이에 고무된  신라의 경애왕은 강해진 고려와 동맹을 맺고,
미약하나마 군대를 파견하여 고려와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신라는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정치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군사적 능력만큼은 왕건보다 한 수 위였던 견훤은 이 꼴을 보고,  
고려와 본격적인 쟁패 이전에 신라를 정리하기 위해,
환갑의 나이임에도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서라벌을 급습하였다.
견훤의 허를 찌른 공격에 당황한 왕건이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경애왕은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살해된 뒤였고,
김 부를 왕위에 올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견훤은 전리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말머리를 돌린 뒤였다.
열 받은 왕건은 추격을 하였고,
딴에는 퇴로를 차단한다고 팔공산으로 향했으나,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견훤에게 간파당하여 역관광을 당하고 말았다.
이끌고 갔던 5천의 기병은 거의 전멸하였고, 왕건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겨우 구사일생하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로써 신라는 후백제의 속국이 되다시피 했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견훤은 여세를 몰아 20년 전에 궁예에게 빼았겼던 나주까지 수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로써 견훤이 다시 전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나, 태조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새로이 한반도 최강자 된 견훤이, 뛰어난 군사지도자이기는 했으나 훌륭한 정치가는 못되었는지, 점령지역의 인심을 잃는 우를 범한 것이다. 
자신들을 아무 때나 털어갈 수 있는 식량창고 쯤으로 생각하는 견훤에게 넌더리가 난 경상북도의 호족들은 대거 고려로 귀순해 버렸고,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경순왕 또한 친 고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와 더불어 발해의 유민들 또한 꾸준히 유입되어, 고려는 다시 체력을 비축하게 되었고,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동안의 열세를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는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비관적이었으나,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 행, 장정필 등 소위 안동 삼태사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고려군은 8천의 후백제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승리하였다.
이는 이전 나주 공략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왕건의 친화력이 올린 또 한 번의 개가였다.
삼태사는 각각 안동 김 씨, 안동 권 씨, 안동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창 전투의 승리 후 경주를 방문한 태조는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 제 세력들을 모두 확고한 친 고려파로 만들었고,
그 여파로 강릉과 울산의 11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나주도 도로 빼앗아, 견훤의 목줄을 다시 쥐었다.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 온 것이다.
이후에도 견훤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어갔으나, 
뜻밖에도 견훤이 아들에게 쫓겨나 고려로 귀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태조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고, 상보(어르신)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는데,
이 꼴을 본 눈치 보기의 달인 경순왕도 뒤질세라 항복하였다.
이로서 명분이란 명분은 모조리 움켜지게 된 태조는,
견훤이 귀순한 이듬해인 936년,
친히 출병하여 후백제의 패륜아 신검을 토벌하여, 후삼국시대라 칭해지는 난세를 끝장 내었다.
발해 유민을 포함한 민족 국가 KOREA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견훤.
다른 것은 몰라도 친화력만큼은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호족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적이 되었으니,
일의 성패를 떠나 인간적인 고뇌가 많았을 것이다.

태조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 하는데, 살던 동네가 송악이니 그렇게 우길 수도 있겠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0년 가까이 되었고, 고증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금을 쌓아놓고 사는 엄청난 부자였고, 
조부 작제건은 당숙종의 사생아라고 하는데, 이건 뻥일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중요해도 증조모를 불륜녀로 만드면 쓰나? 
부친 왕륭(용건?)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대대로 앞 글자가 다른 것으로 보아 성씨를 쓰는 전통의 귀족가문은 아니겠고, 
해상 무역으로 부와 세력을 쌓은 평민 출신의 졸부가문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해상무역은 반 해적질이므로 청해진 계열과도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있었을 것이고. 
뭐가 어찌 되었건 난세에 훌륭하게 어울리는 가문이었다.

온 집안의 관심과 기대 속에 무럭무럭 자란 아들이,
꼴불견의 다른 부잣집 아이들과는 달리 영특하고 늠름하였던지, 아버지는 최고의 교육을 베풀었고,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궁예에게 투항한 뒤에도,
전 재산을 들여 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명문 귀족 가문에 비해 아무래도 손색이 있는 자신의 가문을,
자식을 통해 업그레드시키고 싶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왕건은 부모 잘 만나 허우대만 멀쩡한 그냥 도련님이었을 것이므로, 
자수성가한 궁예에게 처음부터 높이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나,
교육 잘 받은 이 젊은이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난세에 꼭 필요한 탁월한 전쟁수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처리면 전후처리, 일반 행정이면 일반 행정,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고루 갖추어, 신임과 총애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던 이 엄친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족들의 중심인물이 되어갔을 것이나, 
무릇 강한 신하는 군주의 악몽인 법이고, 근본 자체가 다른 왕건은,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던 궁예에게는 더욱 맞지 않는 신발이었을 것이다.
최대위기는 궁예가 말도 안 되는 독심술로 반역을 추궁할 때였는데,
당시의 대화를 보면 궁예가 태조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꾼 듯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궁예가 왜 빼어든 칼을 도로 꼽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그 이유가 뭐였든, 궁예의 마음속에 태조를 아끼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에게서 조차 신뢰를 받는 특이한 성품은 이후에도 고비마다 계속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견훤이 왕을 만들어 줬던 눈치왕 경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아자개는 아들이 왕노릇을 하고 있는 후백제가 아니라 그 경쟁자인 고려에 귀순했고,
견훤 본인도 말년에 아들에게 쫓겨나자 필생의 적수였던 태조에게 의탁하였다.
참으로 기가 찰 일이지만, 어쨌든 이 특이한 성품이,
군대를 부리는 능력은 견훤에 못 미쳤고,
군신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궁예에 비해 한참 부족했던 왕건이라는 인물이,
당대의 걸출한 영웅들을 모조리 꺾고, 발해의 유민까지 흡수하여,
한민족의 중시조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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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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