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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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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2대 혜종, 한심하다고?

은혜 혜(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놈들은 암군이거나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모욕하기 위해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한심한 인간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충혜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수준을 넘어가는 인간말종에게는 양(煬)자를 쓰는데, 
불효막심, 허랑방탕, 음란무도, 후안무치, 가렴주구, 인명경시.. 등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는 뜻으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던 수양제 양광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양광의 시호는 원래 ‘명’이었으나,
수나라의 멸망 후, 이 인간에게 원한이 많았던 당의 건국 세력들이 ‘양’이라고 불러 비하하였는데,
이렇게 비하한 데에는, 전 황조를 깎아내려 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나,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공감을 얻어 시호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혜종은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멋진 태자였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2년 남짓밖에 왕 노릇을 못했으며, 죽어서도 ‘혜’자를 받아야 했을까? 

휘는 무, 25남 9녀에 달하는 태조의 자식들 중 맏이이다.
나주 미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로, 태조의 의지로 태자에 책봉되었고, 
고귀한 신분임에도 통일 전쟁에서 맹활약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태조의 신념은 통일 후에도 변함이 없어, 후계구도에 흔들림이 없었고,
943년 태조가 2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서거하자 그 유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명분이나 자질, 나이, 태조의 심중 등, 무엇 하나 결격 사유가 없는 완벽한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막상 왕 노릇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조정은 이미 너나없이 외척, 공신인 거대 호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나름의 지분을 가진 이들은 방자한 행동을 넘어 불경도 서슴지 않았는데,
얼굴에 주름살이 많다며 주름살 대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 주름살이 많은 이유가 태조와 오씨 부인이 정사를 나눌 때 돗자리에 질외 사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망측한 소문까지 퍼뜨렸다.
태조의 호족 우대 및 화합 정책의 부작용이자, 창업국가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었는데, 
이러한 기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하였으나, 
적몰되다시피 한 외가는 논외고, 처가의 무력도 별 볼일 없었으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인 고명대신들 밖에 없었던 당시 혜종에게,
칼바람을 동반한 왕권강화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태조는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 왕규와 우직한 친위 무장 출신 박술희에게 유명을 남겨,
애틋한 연인의 소생이자 맏아들인 혜종의 안위를 부탁하였는데,
왕 규는 수도 인근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외척으로,
태조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군사적 기반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약했다.
반면에 박 술희는 궁예의 호위병에서 출발하여 대신까지 된 사람이므로,
그 충성심과 군사적 능력만큼은 출중했을지 모르나, 
대 호족들을 상대할 만한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태조는 장단점이 서로 다른 이 둘을 묶어 혜종을 보필하게 함으로서, 
아들이 안전도 보장받고, 세력 간에 조화를 이루어 화합의 치세를 열어가길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자상한 아버지의 고심에 찬 배려였으나,
태조와 달리 혜종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외부의 도적놈들이 아니라, 든든한 외가의 지원을 받는 같은 피를 나눈 이복형제들이었다.
이 내부의 적들은 다루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시대의 적들 보다 훨씬 더 위험하였다.

혜종의 최대 정적은 충주 유씨의 외손들인 왕 요(정종), 왕 소(광종) 형제였는데,
야심가였던 왕 요는 동생 왕 소와 함께, 왕의 대리인 격인 왕 규와 즉위 초부터 대립하였고,
1년여 만에 반란 혐의로 피소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게 숙청의 신호탄이 되어 외척, 공신들이 줄줄이 멸족되고 왕권이 대폭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나, 
멸족은 커녕 왕 소가 부마가 되며 더 기세등등해졌다.
이에 실망한 왕 규는 왕을 갈아치우고 자신의 외손인 광주원군을 세우기  위해,
박술휘를 귀양 보내었으며, 혜종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고 하는데,
첫 번째 암습 시, 혜종은  침실로 침입한 자객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무골로서의 위용을 드러내었고, 
두 번째에는 왕 규가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최지몽의 제보를 받아 미리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왕 규는 왜 벽을 뚫고 들어갔을까?
암살은 은밀함이 생명인데, 군사들을 대동하고 궁궐을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벽을 뚫으며 소란을 피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리고 그 정도 소란을 피웠으면서도 왜 근처를 수색하지 않았을까?
또한 제보자라는 최지몽은 이후 행적으로 보아, 왕 요의 측근이 분명한데 왜 이 자가 혜종을 도왔을까?
뭐가 어찌 되었건 이러한 상황 전개는 혜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는데,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발병과 사망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전쟁 영웅이자 맨손으로 칼든 자객과 격투를 벌일 정도의 기백을 갖춘 혜종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혜종은 말년에 아첨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신하들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위험했었다는 뜻도 되므로, 사망 또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혜종은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시달리기만 하다가, 
2년 4개월여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945년 사망하였는데,
혜자 묘호를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절손까지 되었다 하니, 안습이 아닐 수 없다. 

*왕 규 (함규)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으로 개국공신이며 사성 왕씨이다.
태조에게 딸 둘을 바쳐 왕자를 생산하게 하였고, 박 술희와 함께 태조의 유명를 받은 고명대신이며,
혜종에게 나머지 딸을 후궁으로 들인 2대에 걸친 외척이었다.

외가와 처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혜종에게 왕규는 새로 생긴 든든한 처가였으므로, 
왕 규는 자연스레 왕당파의 수장도 되었을 것이다. 
명목만 놓고 본다면 당대에 그를 능가하는 스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데,
이렇게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살아오며 남부러울 것 없게 된 왕 규가,
어리석은 야심을 품고 실익도 명분도 없는 반란을 획책했다는 것이 왕 규의 난이다.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945년(혜종 2) 왕 규는 야심을 품고,
임금의 이복동생 요와 소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임금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고,
또한 점복에 밝은 최지몽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고 하니, 
임금은 왕 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여, 소를 부마로 맞이하여 집안을 튼튼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 규는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임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마침 잠이 깨어 한 주먹으로 이놈을 때려죽인 후 사람을 불러 끌어내게 하여 실패하였다.
그런데 왕은 이 엄청난 일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는 임금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에 있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것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으로 옮겼는데.
그날 밤에 정말 왕 규가 심복들을 거느리고 벽을 뚫고 침입하였고,
임금이 그 자리에 없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최지몽에게  “너의 수작이 아니냐?”라고 물었으나,
최 지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임금도 이를 불문에 붙였다 한다.
그해(945년)에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정종인데,
혜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했던 왕 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령을 사칭하여 왕실에 충성한 박 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 규의 동태를 전부터 알고 있던 정종은,
혜종의 병이 위독하자 서경의 수비대장 왕식렴과 미리부터 연락을 해두었고,
왕 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 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고, 
이에 왕식렴은 왕 규를 붙잡아 갑곶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 라는 것이 왕규의 난이다.

이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왕 규는 왕족을 무고하는 중죄를 지었는데도 별 일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당당한 세도가였고, 최지몽은 천기를 읽는 도인으로 반란 전문 예언가였다.
혜종은 까짓 암살쯤은 자신의 무용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정도로 생각하는 쿨가이였고, 
이복동생들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쿨가이가 안타깝게도 명이 짧아 사망하자, 
신하들은 그의 어린 아들은 어떻게 되든 말든, 이복 동생을 왕위에 올려 그의 뜻을 기렸는데,
벽을 뚫고 암살을 하겠다는 발상을 할 정도의 터프가이 왕 규는, 
귀양 가 있어서 대국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는 동료 고명대신 박 술희를 왕명 사칭까지 해서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왕식렴이 눈을 부라리자 꼼짝도 못하고 얌전히 있다가 멸문당하였다.
….는 이야기인데, 아닐 것이다.

왕 규의 난은 승자의 기록이고, 실제로는 왕식렴의 난이라는 말이 있다.
왕 요와 왕식렴의 난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으나, 
뭐가 되었건 왕 규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기록의 이면을 추측해 보면,
야심가는 왕 규가 아니라 왕 요 즉 정종이 되므로, 
945년 왕 규의 고변은 무고가 아닌 사실이고, 정종 일파에 대한 왕당파의 선전포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고변을 계기로 정종을 지지하는 충주 유씨 세력과 왕 규를 비롯한 왕당파 간에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암투가 있었으나,
왕당파가 밀렸고,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최지몽이 정종의 사자로 파견되어 천기를 읽는 도인 행세를 하며 은근한 협박을 하자, 힘으로 안되는 왕당파는 왕 소를 부마로 삼아 적 분열을 노리는 등, 왕이라는 프리미엄을 사용하여 반격을 하였고,
이에 정종은 혜종을 암살하여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였으나, 
혜종의 놀라운 무용과 벽을 뚫는 왕 규의 기민한 대처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연속된 암살 시도는 왕당파의 경각심을 불러, 혜종 주위에 인의 장막을 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교착상태로 시간을 끌게 되면 현직 왕이 유리해 질 것이 뻔하였므로, 
상황 타파를 위해 정종은 서경의 군벌 왕식렴을 끌어 들였고,
왕식렴은 개경으로 들어오자마자 혜종을 제거하고 정종을 옹립하였다.
왕당파는 이러한 반역에 당연히 반발하였으나, 
왕식렴이 왕당파의 행동대장격인 박술희를 우선 제거하고 무력으로 밀어 붙이자,
왕 규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패배하였고,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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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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