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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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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4대 광종, 제 2의 건국

이름은 왕 소, 천둥에 놀라 죽었다고 기록된 친형의 뒤를 이어 949년 왕위에 올랐다.
혼란스러웠던 이복형과 친형의 치세를 온몸으로 겪었던 광종은 형들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선 나라의 안정에 주력하여 공신들의 표준 녹봉을 정하는 등 호족들을 다독였고, 성을 쌓아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필요한 조치들을 시행하고, 자신의 정치력 배양에도 힘쓰며, 이후의 정국을 구상하던 중,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그동안 사용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후주의 연호를 따르는 등 대중원외교를 강화하였다.
후주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시하였는지, 고려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대하였다.
후주와의 잦은 교류는 왕권 강화를 모색하고 있던 광종에게 영감을 주었고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953년에는 승려 겸신을 국사로 봉하여 화엄종을 왕실 종파로 만들었고, 부모를 위해 절을 지었으며, 
균여대사의 성상융회 사상을 받아들였다.
성상 융회는 화엄종과 법상종을 서로 합치자는 것인데, 
두 종파의 교리상 미묘한 차이야 알 바 없으나, 
개략적으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라는 화엄원리는 언제든 전체주의적인 정치사상으로 변질이 가능하였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고 세상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법상종의 교리 또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국가 건설에 걸림돌이 될 리 없었으므로,
성상융회는 전제적 왕권을 꿈꾸는 광종의 입맛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두 종파의 신봉자들인 중소호족들과 일반 백성들을 친왕파로 만드는 보너스도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오매불망 왕권 강화를 원했던 광종에게 두 종파의 융합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의 정신세계까지 보살핀 왕은 제위보를 설치하여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구호하였다.
그동안 전쟁과 잇따른 정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심신 모두를 다독인 셈이므로,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성군으로 칭송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한 5년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다독이며 힘을 기르던 광종은, 
956년 후주 출신 개혁가 쌍기와 그 동반 귀화인들을 전격적으로 등용하면서 본색을 드러내었다.
쌍기의 진단은 ‘왕보다 힘이 쎈 이미 문벌화 된 귀족세력들이 만화의 근본’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으나, 
그 처방만은 확실했다.
쌍기는 문벌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인 노예에 주목했고, 노비안검법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노비안검법은 전쟁으로 포로가 되었거나, 빚에 의해 노비가 된 자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준다는 상당히 정의롭고 인도적인 모양새를 갖춘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수준에서 원래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방법이 별로 없었고, 
원래의 시행 목적이 사회정의 보다는 문벌 귀족세력의 약화였으므로,
노비가 관청에 찾아와서, ‘나는 원래 양인이었노라’고 신고만 하면 바로 양인이 될 수 있었다.
정의고 인도고 나발이고를 떠나,
대부분의 생산을 노예의 노동력에 의지하던 시대에, 노비의 상실은 기존 질서의 몰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노비 소유자들은 대부분 불만을 표시했고, 가장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던 문벌 귀족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였는데,
조정관료들 또한 대부분 문벌귀족가문 출신이었므로, 격렬한 성토는 물론 사직서를 던지기 일쑤였으나,
왕은 이들의 공백을 귀화인들로 채우며 물러서지 않았고, 반란의 움직임이 보이는 족족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다.
반발이 있든 말든 작심하고 밀어 붙인 결과 노비안검법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문제는 해방된 노예들의 생계였다.
당시 사회 경제 수준에서 해방된 노예들에게 일자리까지 챙겨 줄 수는 없었고,
놀고 먹어도 되는 복지 사회는 꿈도 꿀 수 없었으므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해방자들은 별 수 없이 소작인이 되었고, 도로 노예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예나 다름없어도 양인은 양인이므로, 국가는 조세와 부역 그리고 군역을 부과할 수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귀족들의 부담이 되었다.
노예들은 좋다가 만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귀족들의 사병과 수입은 대폭 감소하였고, 국가의 세수와 병졸들의 숫자 등은 크게 증가하였으므로, 
왕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여세를 몰아 사병 혁파까지 밀어붙였으나 호족들의 반대로 무산 되고 말았는데,
당시 고려 사정에서 사병을 완전히 없애고, 정부의 힘만으로 전국의 치안, 방어 등을 담당하기에는 무리였으므로,
왕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고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이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 또한 사실이었으므로,
귀족들은 이러한 승리에 고무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왕에게는 오래전 부터 준비해 온 진정한 노림수가 따로 있었다.
큰 비용 안 들면서 명분 확실하고 효과는 뛰어난, 과거제가 왕이 준비한 다음 한 수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동양에만 존재했던 인재 선발 시험으로서, 
개인은 자아실현, 국가는 우수 인력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이다.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국가를 환골탈태시킬 수도 있는, 군주에게 아주 편리한 제도인데,
이렇게 좋은 제도가 서양에서는 끝내 출현하지 않았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정착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를 비롯한 모든 공개 채용 시험은 기본적으로 평등이라는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기득권 세력에게는 불편한 제도이다.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려면 우선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응시자는 많고 합격자는 적으니 우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좋은 선생 구해서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게 해준다 해도 애가 머리가 나쁘면 안 되고, 
군주가 원치 않는 세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도 있었다.
또한 시험에 통과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충성하는 집단이 되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쉬웠으므로, 
기득권세력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제도였다. 
족쇄를 반기는 바보는 세상에 없으므로 시행을 위해서는 군주의 정치력이 가장 중요하였을 것이다.

고려 초의 호족 공신들은 하늘의 아들 보다는 대두목이 훨씬 만만하고 편한, 
무장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왕권을 신성시하고 군신간의 질서를 강조하는 유학의 이념과는 잘 맞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광종은 과거제 시행을 계기로 고려 방방곡곡에서 학풍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는데,
이는 조폭 연합체와 같은 나라꼴을 환골탈태시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당시 호족들에게는 정체성을 바꾸라는 요구나 다름없었으므로, 
과거제의 도입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종기의 천도 계획을 능가하는 파괴력 있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958년, 중원의 혼란을 피해 몰려든 귀화인들로 조정을 채워 친위세력을 구축한 후,
쌍기를 지공거로 하는 진사, 명경, 복업과를 실시하여 7명을 선발하였는데,
비록 선발 인원은 조촐하였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호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친위대로 궁궐을 둘러싸 신변을 보호하였고 한다. 
960년, 관료들의 복식을 제정하여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내외에 알렸고, 
군부를 개편하여, 군부 내 호족세력을 대폭 해임, 파면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함으로써, 자신이 황제와 같은 절대권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왕권에 귀족들은 당연히 저항하였으나 이미 달리기 시작한 기차였다.

광종기를 특징짓는 공포정치는 역모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첫 사건은 친국을 하여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끝을 내었으나 이후 참소가 줄을 이었고, 
감옥이 가득차서 임시옥사를 설치할 지경까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 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광종은 공신들을 관직에서 내쫓아 버렸고,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 처형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숙청은 정세를 더욱 불온하게 하였고 왕의 의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어, 친족들도 벼락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차기 왕위를 노릴 수 있는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이 처형당하였고,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 효은도 처형하였으며,
심지어는 친아들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칼 밥이 되어야 했던 귀족들이나, 휘두르는 왕이나, 서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광종은 961년 궁궐을 증축하기 위해, 당숙인 왕 육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속사정이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절이 하수상하니 방비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기왕에 개경을 황도라고 선언하였으니 그에 걸 맞는 규모의 궁궐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왕 육의 사저에 이어하고 있는 동안은, 
공격적인 숙청을 자제하고, 새로이 중원의 패자가 된 송과의 외교에 주력하였으며, 
귀법사를 창건하고, 제위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세력과 민심을 다독였다.

964년 증축이 끝나 궁궐로 환궁한 왕은 호족들의 불만 사항을 청취하고자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박 수경의 아들들이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불만을 과격하게 표현하였는지, 아니면 꼬투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은 분노하여 박수경의 아들들을 처형해 버렸다.​ 
이 꼴을 본 박수경은 상심하여 병사하였고.
가문이 결딴 나고 말았다.
평주의 호족 박씨 가문은 광종의 주요 정치기반 중 하나였으나, 
호족으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거되어 권력의 무상함과 비정함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왕은 내친 김에 혜종비와 정종비의 친정아버지인 청주의 호족 김긍률도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를 이어갔는데,
이후로도 도전하는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숙청하였으며, 술자리의 말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승로에 의하면, 숙청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경종 즉위 시까지 살아 남은 공신가의 사람은, 
태조의 삼한공신 3200 중 40여명에 불과 하였다고 한다.
과장이 좀 섞였을 것이다.

975년 여름 재위 26년 만에 향년 51세로 서거하였다.

광종비 대목왕후 황보씨는 광종의 이복누이였다.
성씨가 다른 것은  출생의 비밀 때문이 아니라. 
태조가 자식들에게 성씨를 부여할 때 아들들은 왕씨로, 딸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하였기 때문에,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은 황보씨가 된 것인데,
이 황보씨가 족내혼으로 이복 오라비와 결혼하였고, 남편이 덜컥 왕이 되는 바람에 졸지에 황보씨 왕후가 된 것이다.

족내혼은 가문의 부와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가문 사람들끼리 결혼하던 고대의 풍습이었고, 모계의 전통이 강했던 신라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냥 왕씨로 통일해도 되었을 텐데 태조는 왜 이리 해괴한 일을 벌였을까?
노골적인 신라 왕실의 근친풍습이 중국을 비롯한 북방의 관습과 달랐고, 
원래 힘 센 놈들은 지들이 선진문명이라고 우기는 법이므로, 중국 놈들은 신라의 근친혼을 야만적이라며 멸시하곤 했다. 
미약한 왕권을 그나마 유지하고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근친혼만한 게 없는데, 
되놈들은  경멸을 해대니 별 수 없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닐 수도 있다.
속사정이야 뭐가 되었건 ​고려는 이러한 고심이 필요할 정도로 왕권에 비해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한 나라였다.

태조는 대단한 능력의 창업 군주였으므로, 
각지의 기세등등한 호족들을 달래고 어르면서 끌고 나갔으나,
이 또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장악력이 있는 대 두목 정도의 권위였다.
정비 6 , 후비 23 … 총 29명의 왕후들은  태조의 미약한 왕권을 가려주는 장식들이었으나, 
이는 뒤를 이은 자식들에게는 가시 면류관에 다름없었고, 
기세등등한 호족들에게 둘러싸인 옥좌는 찬란한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벼랑 끝에 마련된 위험천만한 자리였다.
이 위험한 옥좌는 늠름한 기상의 혜종을 어리석고 병약한 왕으로 만들었으며, 
저돌적이고 야심찬 성격이었던 정종을 천둥에 놀라 죽어버리는 졸장부로만들었다. 
광종도 빛나는 왕이 아닌 미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광종에게 개혁이란 왕의 권위니 이상적인 사회니 하는 한가한 형이상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실존의 문제였다.
조폭 연합체 비슷한 체제 하에서, 멍하니 있다가는 이복 형 혜종처럼 어느 놈 칼에든 맞아죽을 위험이 높았고, 그렇다고 서두르다가는 친형인 정종 꼴이 나기 쉬웠으므로, 
무언 가를 하긴 하되 신중해야 했고 확실한 방법이어야 했다. 
즉위 초반 정관정요를 읽으며 방법을 모색하던 광종은, 후주의 사신단에 딸려온 쌍기를 만나면서 확실한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 듯하다.

*후주

곽위의 쿠데타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서 5대 16국 시대의 마지막 왕조이다.후주의 2대 황제인 세종은 당대 최고의 명군이라 불릴 정도로 유능하여, 중원을 거의 통일하였고, 
한족의 비원이랄 수 있는 연운 16주까지 되찾는 기염을 토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7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7살짜리가 나라를 지키기에는 후주의 연륜이 너무 짧았기에, 송 태조 조광윤에게 나라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후주는 그 위세가 무색하게, 3 대, 9년이라는 짧은 존속기간을 가진 단명 국가가 되었으나, 
통일 왕조인 송의 전신으로서 중원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광종은 즉위 초반 부터, 그들의 건국과 놀라운 팽창 그리고 소멸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었고, 
그 혼란 덕분에 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난리 치는 바람에 거란이 고려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는 등 짭짤한 부수입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후주는 광종의 멘토인 동시에 후원자였던 셈이다.

쌍기는 후주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로 보이는데, 건국 사업으로 한창인 제 나라를 놔두고 왜 고려로 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고려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이상을 실천하는데 더 적합한 무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대륙을 쓸어가던 당시 후주의 사정 상 학자보다는 무장이 더 우대를 받았을 것이므로,
무식한 칼잡이들의 비서나 뒤치다꺼리 담당 관리를 하느니,
정복의 시대를 끝내고 내치를 다져나가던 고려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왕의 측근으로서, 지식인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이 백번 나은 삶이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해가 일치한 광종과 쌍기는 호족들을  때려잡고 나라의 시스템을 확 바꾸어야 한다는 목표에 합의하였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에 이어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는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암기력과 문장력을 측정하였으므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공부해야 했는데, 
유학은 그 창시자인 공자의 신분에서 알 수 있듯이 대 귀족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실무를 담당하는  사대부들을 위한 학문이었다.
따라서 그 이념은 천명을 받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적 위계질서였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자 생존 당시의 대 귀족들과도 상성이 맞지 않았으나, 
호족들과는 상극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으므로, 호족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반발을 누르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책사의 역할이 중요하였는데,
쌍기는 이 역할에 안성맟줌인 인물이었다.

쌍기는 광종의 기대에 걸 맞게 시기에 맞는 정책을 입안하였고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는 등 맹활약하였는데, 
과거제를 시행하기 전에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힘을 뺀 것은 쌍기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할 것이다.
노비 해방으로 경제적, 군사적 기반에 타격을 받은 호족들은 중요 고비마다 힘을 쓰지 못해 과거제를
내주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후주의 몰락과 함께 대거 귀화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조정을 장악하는 것도 막지 못해 주요 저항수단을 
잃었고 힘을 결집시킬 수도 없었다.
광종은 약화되고 분열된 호족들을 각개 격파하며 대망의 개혁을 완수하였으며, 
건국 수준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이 제 2의 건국의 일등공신은 광종의 장자방 또는 제갈량이라할 수 있는 쌍기였다.

광종의 개혁은 후속 조치의 미비로 후대에 원상복귀된 것이 많다는 비판이 많으나, 
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과거제는 계속 시행 되었고 조폭두목 같은 호족들도 대부분 제거되어 나라꼴이 일신되었다.
비록 그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귀족 국가가 형성되어,
고려는 여전히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긴 했으나, 
광종 이전의 조폭 시절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사회였고, 백성들이 살기에도 한결 편한 세상이었다.
광종과 쌍기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광종.
고려의 400년 역사를 가능케 한 진정한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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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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