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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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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6대 성종, 고려를 완성하다

왕 치,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신정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영특하여 공부를 잘했고 도덕군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장환경이 불우하여 일찍 철이 들었나 보다.

​981 년 경종의 양위를 받아, 충과 효를 국정의 모토로 삼았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을 세웠다.
이듬해에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 조를 받아들였고,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칭하였다,
다음해에는 3 성·6 관, 칠시, 사헌부, 중추원 등을 설치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12 목을 설치하여 지방 통제를 시작하였고,
송에 사대외교를 펼치는 한편 천제에게 제사하는 원구단을 설치하여 외왕내제를 강화하였다.
10년 여를 밤낮 없이 일한 덕분에 고려는 면모를 일신하였고 제법 틀이 잡힌 나라가 되었으나,
재위 11년째부터 시련이 시작 되었다.
여동생들인 헌애, 헌정 두 왕후의 추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두 여인은 선왕 경종의 후비들로서 모두 간통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중 헌정왕후는 사생아까지 출산하였다.
여염의 일이라면 둘 다 과부였고, 
과거에는 성도덕이 보다 분방하였으므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치부할 수 있었겠으나,
둘 다 태후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는 성종이 유교적 가치 실현을 국정개혁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추문은 왕실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시련은 이듬해에 발생한 위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였다.
고려의 상시적 위협 요소였던 거란이 드디어 침입해 온 것이다.
성종은 안주까지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적의 군세에 비해 준비가 워낙 미흡하여 싸울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중신들도 할지론과 전면 항복론으로 나뉘어 언쟁만을 벌일 뿐 대책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종에게는 희대의 외교가 서 희가 있었다.

서 희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와 당당히 협상을 하여,
송과 외교를 단절하고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는 대신,
당시에 여진족이 살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 강동  6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겉보기에는 거란에 굴복하였고,
영토로 인정받았다는 강동 6주도 실질적으로는 여진족의 땅이었으므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명목상의 외교관계 인정만으로 강대한 적을 물러나게 하였고 추후 영토확장의 명분까지 얻은 것이므로,
협상 실패로 나라가 초토화 되고 거란의 속국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서 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후주 출신들을 중용하는 광종의 정책에 반발했던 서 필을 숙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서 희를 중용했던 광종의 혜안이 고려를 위기에서 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희 덕분에 최대의 위기를 넘긴 성종은 ​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개혁에 매진하였다.
6관을 상서 6부로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12 주로 나누었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과거제도를 강화하였고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여 광종의 꿈을 실현시켰고,
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훈요십조에도 나와 있는 팔관회, 연등회 등을 폐지하였는데,
이는 조선조처럼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폐단시정을 명분으로 삼아, 재정을 절감하는 등의 실리를 얻고자 했던 정책이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던 성종은  997년 과로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쓰러졌는데,
그 간의 각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자신에게 양위했던 선왕의 뜻도 기릴 겸, 경종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거하였다.
향년 38세, 재위는 16년이었다.

아버지 왕 욱이 광종의 이복동생이었고 자신이 광종의 사위였으므로 선왕 경종과는 사촌 간이자 처남 매부 사이였는데,
여동생 둘이 경종의 후비가 되는 바람에 서로 처남이자 매제가 되는 망측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태조의 족내혼 정책 덕분에 초기 고려 왕실의 족보는 대부분 이 모양이었으므로 특별할 것은 없고,
광종의 사위라는 신분이 왕통을 잇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위 상속이 일반적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부자 상속이 상식인 시대였으므로,
힘으로 빼앗은 것도 아니면서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는상태에서,
전 전대 왕의 사위라는 명분으로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나빴고,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유교적 도덕률에도 맞지 않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이 없어 정통성이 있는 당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왕 송이 다음 대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던 성종으로서는, 마음만은 홀가분했을 것이다.

​당시는 광종의 무차별적인 호족 탄압 정책으로 왕을 대두목쯤으로 여기던 호족들은 대부분 소멸되었고,
서희의 집안처럼 나름 역량 있고 왕권에 순응하는 몇몇 가문 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또한 경종도 일종의 보복법을 시행하여 광종기에 세도를 부리던 일부 밉상들을 제거하였으므로,
성종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남아 있던 귀족들과 더불어 나라를 정비할 수 있었다.
비록 정통성이 부족하여 신하들의 주장을 상당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노비환천법 등을 시행하는 바람에 문벌 귀족들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어, 
이후 고려가 문벌 중심의 봉건국가가 되어 버린 아쉬운 점이 있으나,
국가 체제는 삼성 6부제의 완성 및 지방통치 제도의 확립 등으로 이전 시대에 비할 수 없게 안정되었다. 
고려 전기의 국가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된 시기였다.

성종은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확립한 임금이라는 뜻의 묘호라 한다.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극복하였고, 
나라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다가 아까운 나이에 서거한 그의 일생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칭호라 할 수 있다.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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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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