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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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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윤관, 여진 정벌

윤 관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공거까지 지낸 문신이었다.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으로 외가가 신라 왕가와 핏줄이 이어지는 귀족이었으나,
상위 0.1% 문벌 수준은 아니었는지, 
가문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고,
이 전쟁 덕분에 후세에 장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윤 관이 활약한 시대는 동북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는데, 그 바람의 진앙지는
여진의 완안부였다.
거란과 고려의 틈바구니에 끼어 이리 저리 채이며 안습의 삶을 살던 발해의 후예 여진족은,
현종이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낸 후 동북아의 정세가 차차 안정을 찾아가자, 
알아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고,
문종이 고려 최고의 황금기를 이룩하자 고려의 일부를 자처하며 군현제에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숙종기에 이르러,
완안부에 뛰어난 지도자들이 잇달아 나타나며 국가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자,
태도를 바꾸어 거란과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영원히 아래 자리에 있고 싶은 족속은 없으므로, 이러한 여진을 크게 탓할 바는 못 되나,
이를 두고 볼 수만은 또한 없는지라, 
거란과 고려의 조정은 여러 차례 소탕 작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여진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서,
결국 동북아는 다시 힘과 힘이 맞붙는 격동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일종의 쿠데타로 집권했던 숙종은 자신의 존재 의미도 과시할 겸, 작심하고 두 번의 소탕 작전을 실행하였는데,
결과는 대패였다.
이래서야 체면도 체면이지만,
패전과 정통성 부족이 엮이면 군왕으로서의 기반이 뒤흔들릴 수도 있으므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는데,
2군 6위 체제인 당시 고려군의 능력은 그간의 전적으로 보아 믿음이 가질 않았고,
심복 윤 관은 기병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므로,
숙종은 돈 많은 나라의 왕답게 거창한 군사조직 별무반을 탄생시켰다.

별무반은 여진 정벌을 위한 거국적 조직으로,
당시 고려에 살고 있던  20 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귀족, 평민, 중, 노비, 할 것 없이 모두 별무반에
징집되었다.
그 수가 30만에 달하였으며 그 중 말을 소유하고 있거나 다룰 줄 아는 자는 신기군으로 편제되었고,
중들은 항마군이 되어야 했다.
돈이 많이 드는 기병을 대폭 보강하고, 왕실의 최후 친위 예비세력인 승병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아,
전 재산을 들여 일생일대의 대사업을 꿈꾸었던 듯하나, 안타깝게도 실행 직전에 객사하고 말아, 
바톤은 아들 예종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예종은 이들 중 일부를 추려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1년간 군사훈련을 시킨 후 여진을 쳤는데,
이때 동원한 인원은 17만 여명으로, 
그동안 고려가 동원했던 3대왕 정종의 30만, 강조의 30만, 강감찬의 20만 등과 비교할 때 그다지
많은 인원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훈련된 공격군이었고, 비록 수는 적었으나 해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전력임에는 틀림없었다.
17만 대군을 이끌 원수는 대를 이어 확실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윤 관, 부원수는 오연총이었으며, 
당대의 용사 척준경이 종군하였고, 예종은 전선에서 가까운 서경에 머물며 공격군을 독려하였다.
서경은 옛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토회복의 의지가 담긴 고려의 제 2수도였으므로 그 상징하는 의미
또한 심장하였다.

​1107년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입수한 윤 관은 겨울이 시작되는 음력 10월, 
대망의 고토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는데,
정공법으로 바로 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진의 추장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후 참살하는 기만책을 사용하였다.
민족의 위인이 사용한 방법치곤 좀 치사하긴 하지만,
숙종 부자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임감이 지대하여 그리하였을 수도 있고,
무인의 자부심 보다는 책략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문사 출신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윤 관이야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치고,
속아 넘어간 여진의 경솔함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인데,
얘네들 속사정도 자세히야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음력 10월이면 함경도지방은 완전히 겨울이라,
눈 덮인 산지에서는 보병이고 기병이고를 떠나 군대 자체를 움직이기 힘들므로,
하던 전쟁도 멈추는 시기였고, 
이전에 포로가 되었던 추장도 석방한다고 하니, 고려의 화친 제의를 지들 편한 대로 생각한 듯하다.
뭐를 어떻게 생각했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추장들이 윤 관의 초대에 응하여 저마다 나름의 단꿈에 젖어 흥겨운 술잔을 기울였는데,
이 잔치는 홍문지연이었고,
이들은 유방과 달리 번쾌가 없어 피하지 못하여, 약 400여명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기만책을 성공시킨 고려군은 즉각 다섯 갈래로 나뉘어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는데,
수뇌부가 몰살되다시피 한 여진은 조직적인 대응은 생각하지도 못하였고,​
오만여의 주력군을 이끈 윤 관이 보동음성까지 쭉쭉 밀고 올라가자, 
성을 의지하여 발악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이들의 저항은 처절하였으나 결국 척준경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방향의 공격군 또한 순조롭게 여진 부락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렇게 100여 촌락을 접수한 윤 관은 몽골라령 아래에 영주성을 쌓았으며, 화관령 아래엔 웅주성을, 
오금림촌에 복주성을, 궁한이촌엔 길주성을 쌓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수백 년 만에 고토를 회복한, 후세의 사가들이 감격에 몸을 떨 만한 사건이었지만,
조상대대로 그곳에 살던 여진에게는,
고려군이 유목민 전사들과 같은 약탈군이나, 징벌을 위한 일회성의 군대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사기를 당해 부모 죽고 사는 집까지 빼앗긴 꼴이 된 여진 전사들은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쳤을 것이다.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의 상황이 된 여진 전사들의 투쟁은 당연히 가열차게 전개되었고,
고려군은 곳곳에서 고전하게 되었다.
총사령관 윤 관도 가한촌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고립되었는데,
당시 윤 관이 거느리고 있던 8000 여의 군사는 거의 죽거나 흩어져서 10여명만 남은 상태였고, 
동행했던 부원수 오연총마저 화살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항복을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나, 
윤 관은 민족의 위인답게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끝까지 항전했…. 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쟁 초기에 자신이 한 짓도 있고,
앞으로 고려에서 살아가야 할 자손들도 생각해야 하므로, 항복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문사 출신이었으니 유언장의 문구 따위를 고민하지나 않았을까?
아무튼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었는데,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 있던 척준경이, 의리의 사나이답게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생사를 도외시한 채 구원의 손길을 뻗어 왔다.  
이 희대의 무인은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여진군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는데,
참으로 믿기 힘든 무용이나 어쨌든 이 덕분에 윤 관은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척준경은 합문지후에 봉해지고, 윤 관과 부자의 연을 맺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의 능력은 석년의 유금필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윤 관의 여진 정벌은 중도에서 좌절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윤관은,
여진의 이를 악문 저항에도 불구하고, 침입 이후 석 달 만에 6성을 완공할 수 있었고, 
3월에는 3개성을 더 추가하여 그 유명한 동북 9성을 완성하였다.
9성 각각의 이름은 함주, 영주, 길주, 복주, 우주, 공험진, 의주, 통태, 평주 등인데,
각각의 정확한 현재 위치는 논란이 많으나,
뭐가 되었건 함경도 지방의 유일한 곡창, 함흥평야 일대는 확실히 포함하고 있었던 듯하다.
두만강 위쪽으로 700리라는 설도 있으나, 인적도 드문 황무지에 성까지 쌓았을 것 같지는 않다.
말뚝을 박았을 수는 있다.

아무튼 우리 역사상 드물게 이민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한 경사 중의 경사였으므로,
임금은 윤 관을 불러 포상하고 잔치를 열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는 발해멸망 이후 한반도 동북지방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여진족에게는 마지막 밥줄이
끊겼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못 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특성 상, 
여진족은 강력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고려군 또한 수백년 만에 되찾은 고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아무래도 절박함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나마 의지가 되는 성 또한  위치가 별로여서 수비군이 고립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결국 구원하기도 지키기도 곤란한 나날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 소모되는 물자와 인명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2차 침입 때의 거란 꼴이 난 고려는 예정했던 식민 사업은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여진의 또 다른 종주권자이자 아직까지는 동북아 최강자인 거란의 동향도 신경이 쓰이는데다가,
함경도의 지세가 보통 험한 것이 아니어서,
물자와 인력을 보내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았고 기간도 한정이 없으니, 걱정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진족은 공격만 한 것이 아니라, 
군을 물리기만 하면 이후로는 고려를 침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대손손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애원하는 등의 능란한 외교술을 사용하여,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 고려에 갈등의 불을 질러 버렸다.

자고로 생기는 것도 없이 사람만 죽어 나가는 전쟁 좋아하는 백성 없고, 자기 재산 축나는 것을 즐기는 귀족은 없는 법이니,
철군의 여론이 힘을 받게 되어 젊은 왕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는데, 
7월 오연총이 영주성에서 대패했다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결정적인 한 방에 예종은 무너졌고, 철군을 명하였다.
9개월 여 동안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손만 남은 격이니,
후손인 우리의 입장에서도 일장춘몽의 허무감을 지울 수 없는데,
혈기 방장했을 젊은 왕은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그러나 상대였던 여진은 상황이 달랐다.
분열의 대명사였던 여진은 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을 대치하는 동북아의 패자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믿기 힘든 성장의 배경으로, 고려가 헌납한 꼴이 된 동북 9성이 거론되고는 있으나,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뭉쳐진 힘이므로,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쟁 초기, 사기를 당하여 수뇌부가 몰살된 것이 그들의 고질적인 분열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을까?

뭐가 되었건, 그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에게서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당시의 철군 결정이 아쉽기도 하고, 정주 민족의 한계를 느끼게도 하지만,
공연히 미적대다가 진창에 빠져 국력을 있는 대로 다 소모하고 되치기를 당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포기하여 명목상이나마 명분을 챙기고,
남은 전력을 보존하여, 여전한 동북아의 강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의미 없는 인명의 소모도 막았고, 왕권도 지켰고.

좋다 만 전쟁이었으나 이 정벌 덕분에,
금은, 거란과 달리 대제국이 된 이후에도 고려를 대규모로 침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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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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