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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토요일) 5:31 오전

김경순 기자

김경순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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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10대 정종, 거란에 판정승하다

왕 형묘호의 발음이 3대왕과 같아 혼동이 되지만 한자도 다르고, 발음도 당시에는 구별이 되었을 것이다.명이 짧아 20을 못 넘기고 요절한 친형의 뒤를 이어 17세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1034년이었다.사춘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 못지않게 똑똑했기에, 열여섯에 시작한...

고려 : 9대 덕종, 똘똘한 아이

​왕 흠. 위대했던 아버지가 40세가 되던 1031년, 저승사자의 이른 방문을 받는 바람에, 요즈음이라면 학원 다니느라 바쁠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야 했다.이 나이면 거란의 동갑나기 흥종 처럼 모후가 섭정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이 소년은 워낙 어린 시절부터...

고려 : 거란의 3차 침입, 귀주대첩

제 3 차 여요 전쟁2차 여요전쟁이...

고려 : 8대 현종, 위대한 임금님

어머니 헌정왕후는 불행한 사랑을 한 여인이었다.남편 경종이 사망한 후 돌 볼 자식도 없이 궐을 나가야 했던 젊은 그녀는, 외로웠는지 아니면 심심했는지, 그만 이웃에 살던 숙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이 숙부가 유부남이었다.현대적 관점이라면 유부남이 아닌 숙부와의 사랑만으로도 갈 데 없는 패륜이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랑스러울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다지 큰 흉이 되지도 않는 일이었으므로, 여염이라면 그냥 저냥 만나서 살다가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유교적 국가질서 확립을 국정철학으로 삼았던 현왕의 여동생이자,...

고려 : 7대 목종, 게이의 슬픔

왕 송, 헌애왕후의 소생으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나, 경종이 사망했을 때 2살 남짓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여 왕위를 잇지 못하였다.이러한 경우, 보통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간주되어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살기 쉬우나, 도덕군자 성종은 왕 송을...

고려 : 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전쟁

제 1 차 여요전쟁거란족은...

고려 : 6대 성종, 고려를 완성하다

왕 치,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신정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영특하여 공부를 잘했고 도덕군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장환경이 불우하여 일찍 철이 들었나 보다. ​981 년 경종의 양위를 받아, 충과 효를 국정의 모토로 삼았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으로 추존하여...

고려 : 5대 경종, 전시과를 만들다

왕 주, 광종의 맏아들이자 외아들이었다.광종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꼬투리만 잡히면 처형을 하였는데, 단순히 사람 죽이는 재미로 그런 것은 아니고, 연이은 참소에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게 되자,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차피 호족이고,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옥석구분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던 호족들은 왕의 교체를 생각하였을 것이고, 교체한다면 명분이 클수록 좋았을 것이므로,최고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비운의 왕태자들인 혜종의 아들과 정종의 아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고려 : 4대 광종, 제 2의 건국

이름은 왕 소, 천둥에 놀라 죽었다고 기록된 친형의 뒤를 이어 949년 왕위에 올랐다.혼란스러웠던 이복형과 친형의 치세를 온몸으로 겪었던 광종은 형들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우선 나라의 안정에 주력하여 공신들의 표준 녹봉을 정하는 등 호족들을 다독였고, 성을 쌓아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였다.필요한 조치들을 시행하고, 자신의 정치력 배양에도 힘쓰며, 이후의 정국을 구상하던 중,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그동안 사용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후주의 연호를 따르는 등 대중원외교를 강화하였다. 후주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시하였는지, 고려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대하였다.후주와의 잦은 교류는 왕권 강화를 모색하고 있던 광종에게 영감을 주었고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953년에는 승려 겸신을 국사로 봉하여 화엄종을 왕실 종파로 만들었고, 부모를 위해 절을 지었으며, 균여대사의 성상융회 사상을 받아들였다.성상 융회는 화엄종과 법상종을 서로 합치자는 것인데, 두 종파의 교리상 미묘한 차이야 알 바 없으나, 개략적으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라는 화엄원리는 언제든 전체주의적인 정치사상으로 변질이 가능하였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고 세상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법상종의 교리 또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국가 건설에 걸림돌이 될 리 없었으므로,성상융회는 전제적 왕권을 꿈꾸는 광종의 입맛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두 종파의 신봉자들인 중소호족들과 일반 백성들을 친왕파로 만드는 보너스도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오매불망 왕권 강화를 원했던 광종에게 두 종파의 융합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이렇게 백성들의 정신세계까지 보살핀 왕은 제위보를 설치하여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구호하였다.그동안 전쟁과 잇따른 정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심신 모두를 다독인 셈이므로,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성군으로 칭송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한 5년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다독이며 힘을 기르던 광종은, 956년 후주 출신 개혁가 쌍기와 그 동반 귀화인들을 전격적으로 등용하면서 본색을 드러내었다.쌍기의 진단은 '왕보다 힘이 쎈 이미 문벌화 된 귀족세력들이 만화의 근본'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으나, 그 처방만은 확실했다.쌍기는 문벌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인 노예에 주목했고, 노비안검법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노비안검법은 전쟁으로 포로가 되었거나, 빚에 의해 노비가 된 자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준다는 상당히 정의롭고 인도적인 모양새를 갖춘...

고려 : 3대 정종, 천둥에 놀라서?

이름은 왕 요, 야심만만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한다.  총 25남 9녀에 달하는 태조의 자녀 중 세 째 아들이고, 충주의 대 호족 유 긍달의 외손이자 후백제의 투항 세력을 대표하는 박영규의 사위였다.신명순선왕후의 5남 2녀 중, 요절한 형을 대신한 실질적인 맏아들이었으며, 친누이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결혼하여 신라 왕실과는 사돈 간이었다. 혜종과는 달리 든든한 배경을 지닌 로열 패일리였던 셈이다.  945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왕 규를 비롯한 선왕의 측근 세력을 쓸어버렸고, 왕식렴의 서경 세력과 동맹을 확실히 하였으며, 개국사의 불사리 봉헌에 참여하였고, 경전 간행을 위한 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 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정권 찬탈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여러 세력들과 직, 간접의 원한을 맺게 되었고, 정통성이 심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민심은 물론 제 호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고려 : 2대 혜종, 한심하다고?

은혜 혜(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놈들은 암군이거나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모욕하기 위해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한심한 인간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충혜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이 수준을 넘어가는 인간말종에게는 양(煬)자를 쓰는데, 불효막심, 허랑방탕, 음란무도, 후안무치, 가렴주구, 인명경시.. 등등 온갖 나쁜 짓을...